닫기

[강성학 칼럼] 21세기에 바라본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koreanwave.asiatoday.co.kr/kn/view.php?key=20240131010018616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01. 31. 17:59

2023121301001496000079751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오늘날 애국주의(patriotism)와 민족주의(nationalism)는 '조국에 대한 사랑'의 의미로서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구별되어야 한다.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는 그 기원에 있어서 그리고 그것이 수행하는 정치적 기능에 있어서 자유의 아이디어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조국이라는 아이디어에서 사람은 그의 재산, 그의 안전, 그의 법, 그의 신을 발견했다. 그것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버지와 공화정을 동일시했다. 로마시대에 키케로는 공화정을 공적 자유와 법을 연계시켰다. 그러나 중세에 조국에 대한 사랑이 신에 대한 사랑으로 대체되었다. 성당과 왕이 신의 이름으로 인간들을 지배했다. 그리스-로마가 소수를 위한 철학자들을 발견했다면 중세는 다수를 위한 종교의 창립자들을 발견했다. 종교는 인민들의 형이상학이었다.

근대로 전환하는 시기인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에 마키아벨리가 애국주의를 재발견하고 "애국주의가 정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황야에서 외롭게 울부짖는 소리에 머물렀다. 17~18세기 근대국가의 시대가 도래하자 프랑스의 루이 14세처럼 "짐이 곧 국가다"라고 믿는 절대군주를 위한 "왕권신수설"이 지배하게 되었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왕은 계몽군주로서 "나는 국가의 봉사자"라고 우기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의 수사학에 지나지 않았다. 이 시대의 애국주의는 "왕, 만세!"를 외치는 시대였다.

근대에서 1776년 미국의 독립혁명과 1789년 프랑스혁명 후 공화정의 탄생과 함께 진정한 국가에 대한 애국주의가 부활하였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루이 16세를 포함하여 새 공화정의 반대자들을 반역자로 처단했다. 민주공화정은 대서양 건너 오직 미국에서만 유지·발전될 수 있었다. 미국인들은 아메리카라는 '땅'에 대한 충성보다는 새로 수립한 '민주공화정'에 대한 충성이라는 애국주의를 고양시켰다. 반면 19세기 유럽에서는 애국주의가 긴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의 결과 민족주의로 탈바꿈했다. 그리하여 18세기 유럽은 민족통일을 통한 민족국가의 수립이 추구되었고 여기에서 이탈리아와 독일이 전쟁을 통해 민족통일을 이루었다. 그러나 남부유럽의 발칸반도에서는 민족주의의 불길이 여전히 억압당했다. 유럽의 민족주의가 곧 제국주의로 변질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국주의 국가들의 치열한 경쟁은 곧 "대(大)전쟁(the Great War)", 즉 제1차 세계대전 당시까지 역사상 최대의 비극을 초래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불길 속에서 세계인들은 새로운 세상, 새로운 국제질서를 모색했고 두 개의 대안이 등장했다. 하나는 러시아의 레닌(Lenin)이 주창하는 세계의 공산화를 위한 "영구혁명"이었고 계급이 조국에 우선했다. 또 하나는 미국의 윌슨(Wilson) 대통령이 제시한 민주주의와 "민족자결"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파리평화회담에서 윌슨의 민족자결의 원칙은 당시 패배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그리고 오스만 터키제국에만 해당되고 승전국인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일본제국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또한 레닌은 민족주의란 반혁명적이라고 민족을 거부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을 맥 빠진 공산주의 혁명전쟁이 아니라 힘찬 "애국주의적" 전쟁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이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윌슨의 민족자결의 원칙이 동유럽에서는 소련의 스탈린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혔지만 아시아-아프리카의 식민지들에서 "민족국가(a nation-state)"의 수립이 들불 같은 독립운동으로 발전하게 됐다. 그리하여 아시아-아프리카인들에겐 민족주의는 곧 애국주의와 결합되어 그 차이를 구별하기 어렵게 됐다. 이때 소련과 중국은 갑자기 세력 확장을 위해 민족주의 운동에 동참했다. 그리하여 유엔을 중심으로 1960년대에 거의 모든 민족들이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990년에 접어들어 소련제국의 붕괴는 서-러시아에서 그리고 유고연방의 해체에서 모두 10여 개의 새 민족국가들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민족주의란 인류의 홍역"이라고 했다. 그 홍역은 온전히 사라지지 않고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잠복하고 있다. 중동에서 쿠르드족이나 신장의 위그루족과 티베트인들을 포함하여 아직도 크고 작은 민족들은 자신들의 독립적 민족국가를 갈망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과 그 후 냉전시대의 도래는 역설적으로 독일과 중국, 그리고 한국과 같은 전통적 통일국가를 분단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왜냐하면 민족보다 계급을 우선시하는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자결을 중대한 반동적 음모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냉전체제의 종식으로 유럽에서 냉전의 원인이었던 독일은 평화로운 재통일을 이루었지만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공산주의 계급혁명주의자들과 함께 하나의 민주주의적 민족국가를 평화적으로 수립한다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해 보인다.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민족주의도 계급혁명을 위한 하나의 강력한 심리전의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집단적 헌신의 대상이다. 그것은 소속감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최초의 민족주의 철학자로 간주될 수 있는 칼 슈미트(Carl Schmitt)는 인간은 원래 "우리"와 "그들"을 구별하는 존재이고 그것이 국제정치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도덕의 영역에서 최종적 구별이 선과 악 사이를, 경제의 영역에서 이윤과 손실 사이를, 그리고 미학의 영역에서 최종적으로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사이를 구별하는 것처럼 특수하게 정치적 구별은 "친구와 적"을 구별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적과 친구는 공적인 적으로 항상 이해돼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적이 친구보다 우선시된다. 반면 애국주의는 소극적으로 개인적 시민정신을 강조하면서 기존의 국경선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므로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애국주의란 군사적이고 또 문화적으로 방어적인 성격을 갖는 반면 민족주의는 공세적 성격을 갖는다고 진단했다. 핵공포의 냉전시대에 민족국가는 안전의 보장이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애국주의와 동맹의 집단안보가 우선시됐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핵무기의 터부(taboo)시로 인해 동면상태에 머물던 민족주의를 러시아가 다시 부활시킬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핵시대에 민족주의의 위험스러운 장래는 유럽에서 그 신호를 볼 수 있다.

민족주의는 이제 자유와 안전을 약속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증오심과 충돌하는 국가이익에 무기를 실을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맹목적 민족주의는 위험스럽게 공격적이고 남한의 막연한 애국주의는 한가롭게 방어적이다. 21세기에도 민족주의는 갈등과 전쟁의 선동적 이데올로기이다. 침략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오직 강력한 애국주의만이 국가 간의 안전과 평화를 유지해 줄 것이다. 모든 국가의 애국주의만이 궁극적으로 상상하는 핵전쟁을 통한 아마겟돈(Armageddon)의 위협으로 부터 우리 모두를 보호해 줄 것이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

댓글 작성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