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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함무라비 법전의 기본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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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4. 12. 01. 17:49

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19회>
함무라비 법전이 새겨진 돌기둥
함무라비 법전이 새겨진 돌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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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기원전 2334년에 사르곤(기원전 2370~2315년)이 메소포타미아에 최초로 세운 아카드 제국은 그의 후손들이 이어서 통치했지만 200년이 채 못 지난 기원전 2150년경에 무너지고 말았다. 전성기에는 사르곤의 군대가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을 아우르고 지중해와 흑해 지역까지 위세를 떨쳤으나 비대하게 팽창한 제국을 유지하기가 쉬울 리 없었다.

◇제국은 왜, 어떻게 무너지는가?

역사적으로 제국의 형성보다 제국의 몰락은 훨씬 더 쉽게 설명된다. 제국의 형성은 여러 지역에 대한 군사적 침략과 병합의 과정이다. 제국의 몰락은 중앙 행정력의 약화에 따른 지방 세력의 정치적 독립 과정이다. 역사의 어느 시기든 큰 제국이 무너질 때면 중앙 권력에 대항하는 지역의 맹주가 지방 무력을 장악하여 군사적 반란을 일으키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사르곤이 세운 아카드 제국의 몰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르곤은 재임 기간 중 많게는 5000명에 달하는 군사를 손수 이끌고서 군사적으로 복속시킨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도시를 하나씩 순방했다고 한다. 사르곤은 왜 스스로 큰 군대를 이끌고 지방을 돌며 무력시위를 해야만 했을까? 그렇게 스스로 백성의 눈앞에 자신의 막강한 군사력과 지고의 권위를 과시하지 않고선 군사적으로 복속시킨 넓은 지역의 여러 도시국가를 행정적으로 지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르곤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서 지방을 직접 시찰했다는 사실은 아카드 제국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허약했음을 방증한다. 사르곤이 사망한 후 그의 후손들 역시 같은 방법으로 지방 권력을 제압하려 했지만, 그 많은 인원을 먹이고 재우는 것도 모자라 매번 공물까지 바쳐야 했던 지방민들은 원망에 휩싸였다. 사르곤 재임 기간에도 여러 지방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았고, 외적의 약탈 행위도 빈발했다. 수세대에 걸쳐서 아카드 제국은 명맥을 이어갔지만, 비대한 제국은 결국 안팎의 도전과 압박을 견딜 수가 없었고, 제국의 질서는 급기야 무너졌다.

◇중앙과 지방 사이의 긴장과 균형

아카드 제국이 거쳐간 흥망성쇠의 과정은 직접 교류가 없었던 다른 문명권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고대 중국을 보면, 천하 위로 군림하는 천자(天子)는 정기적으로 여러 나라를 직접 순시하면서 지방의 정치와 백성의 생활을 시찰해야만 했다. 유가(儒家) 경전은 천자가 손수 지방 권력을 돌아보며 먼 지방의 백성까지 챙기는 과정을 순수(巡狩)라는 이름으로 미화하지만, 군주가 지방의 유력자와 백성 앞에 인격적 존재(personal presence)를 드러내야만 했던 이유는 행정력의 한계 때문이었다. 반대로 도쿠가와(德川) 시대 일본의 봉건제엔 참근교대(參勤交代)란 제도가 있었다. 각 번(藩, 한)의 영주인 다이묘(大名)가 2년에 한 번씩 1년가량 에도(江戶)에 머물며 쇼군(將軍)을 알현해야 했다. 이 제도는 당시 쇼군의 행정력이 상당히 강했음을 방증한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정부든 지배하는 영토가 확장되면 통치의 비용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더 넓은 지역에서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해서 더 큰 규모의 관료조직을 운영할 수 있어야만 제국의 수도에서 중앙집권적으로 넓은 지방을 관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도로, 항만, 통신, 운송뿐만 아니라 대규모 관료조직과 공권력을 행사하는 군대와 경찰을 유지해야만 하는데, 모든 게 실은 중앙정부의 재정 문제로 나타났다. 메소포타미아에 최초로 나타난 아카드 제국이 행정력의 한계와 기술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200년 가까이 존속됐다는 점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함무라비가 태양신에게서 군왕의 휘장을 받는 장면
기원전 1782~1750년경 제작된 함무라비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태양신 샤마쉬(Shamash)에게서 군왕의 휘장을 받는 장면.
◇제국의 기억, 제국을 다시 세우다

제국이 무너져도 제국의 기억은 오래도록 남는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제국의 무용담이 전설로 전해지고, 역사가의 손에서 손을 거쳐 제국의 역사가 기록으로 남겨졌다. 제국의 선례가 기록으로 전해졌기에 후대의 권력자들은 제국을 복원할 수 있었다. 중국사에서 춘추전국의 혼란기를 종식한 진시황(秦始皇)의 선례는 2000년 넘게 지속된 전통 시대 중국사의 황제 지배 체제를 정당화했다. 나아가 20세기 후반까지도 중국공산당 주석 마오쩌둥은 틈만 나면 자신과 진시황을 비교했다.

메소포타미아 최초 황제 사르곤의 선례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선례는 뒤에 오는 야심가들의 정복욕을 부추기고, 황위(皇位) 쟁탈전을 정당화했다. 군사력을 갖게 된 후대의 야심가들은 사르곤처럼 큰 제국을 만들고 스스로 황위에 오르려 했다.

◇함무라비 법전, 제국의 질서를 닦다

메소포타미아의 후대 정복자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기억된 존재는 다름 아닌 바빌로니아(오늘날 바그다드)의 함무라비(재위 1792~1750년)였다. 사르곤 시대와 함무라비 시대 사이에는 540여 년의 세월이 끼어든다. 다섯 세기 이상을 지나는 동안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선 여러 도시국가 사이의 갈등·분쟁과 외부 세력의 침략에 따른 원거리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을 정복하여 "천하 사방의 패왕"을 자처한 함무라비는 사르곤의 행정 조직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켜 안정된 세수를 확보하고 중앙 권력을 강화했다. 사르곤과 함무라비의 통치 과정을 비교해 보면, 순수(巡狩)와 참근교대의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지방을 돌며 직접 인격적 권위와 군사력을 과시했던 사르곤과는 달리 함무라비와 그의 후손들은 바빌로니아에 수도를 정하고서 여러 지역에 지방관을 파견했다. 국가의 발전사에서 흔히 보이는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도입이었다. 사르곤 정권에 비해 함무라비 정권은 지방까지 미치는 탄탄한 행정력을 확립했다.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지방을 돌지 않고서도 안정적으로 제국을 통치할 수 있었다는 얘기인데, 그 방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역사가들은 이구동성으로 함무라비가 제국의 전 영토와 모든 백성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법전을 제정하여 반포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물론 함무라비 이전에도 법령이 반포되었다. 빠르면 기원전 2500년경 이미 수메르 지배자들은 도시국가의 법을 세웠다. 함무라비는 그러한 법적 전통을 이어서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일반적인 메소포타미아 법전을 제정하고 반포했다. 법전 제정과 반포는 넓은 영토에 퍼져 있던 여러 지역의 도시국가들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적 규범과 지배 원리를 천명했다는 점에서 국가 형성의 기초적 단계라 할 수 있다.

함무라비 법전의 서언은 법의 목적을 정의 실현, 악인 제거, 복리 구현, 약자 보호 등으로 규정한다. 원문의 다음 구절이 대표적이다.

"'바빌로니아를 창조하신' 아누(Anu)신과 벨(Bel)신께서 신을 두려워하는 군주인 나 함무라비에게 이 땅에 정의를 실현하고, 사악한 무리를 물리치고, 강자가 약자를 괴롭힐 수 없게 하고, (바빌로니아의 태양신) 샤마쉬(Shamash)처럼 백성 위로 군림하여 이 땅을 밝히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하셨도다."

세상의 모든 법은 제정될 당시 어떤 한 사회의 관습, 풍습, 가치, 편견은 물론 신분 질서와 경제적 이해관계까지 고스란히 반영한다. 함무라비 법전의 형법을 보면, 살인, 절도, 무고(誣告), 강간, 근친상간, 국왕 명령 불이행, 도망친 노예 은닉 등의 범죄에 사형을 적용한다. 민법은 물가, 임금, 상거래, 혼인, 노예 조건 등을 명시한다. 학자들은 함무라비 법전을 관통하는 기본 정신이 "보복의 법칙(lex talionis)"이라 지적한다. 가해자에게 피해자에 그가 입힌 피해를 그대로 되돌려 준다는 의미이다. 상대의 눈을 찌르거나 뼈를 부순 자는 보복의 원리에 따라서 눈을 찌르고 뼈를 부수는 형벌을 당해야만 했다. 다만 귀족이 노예에 폭력을 가할 사건일 때는 보복의 법칙이 고무줄처럼 느슨하게 적용될 뿐이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함무라비 법전은 만민평등보단 신분 차별을 인정한 모순되고 불합리한 일면이 있었다.

송재윤(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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