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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빌라누스의 항쟁

[칼럼] 빌라누스의 항쟁

기사승인 2024. 08. 01.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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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
지난주 고(故) 이선균 씨의 유작이 된, '탈출'을 일삼아 보았다. '프로젝트 사일런스'란 부제를 달고 개봉한 영화 탈출은 재난영화다. 짙은 안개에 뒤덮인 공항대교 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통제 불가능한 상황은 다중적이고 한편 다층적이다. 하나의 사고 또는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선 여러 겹과 층위의 상황이 연쇄돼 있기 마련이다. 사회라는 복잡계에서 적극적인 참여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간접적으로 사고와 사건 사이에 있다. 다만 한 끗 차이로 사고를 목도한 자에서 피해 당사자 또는 의도치 않게 사건의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유학을 떠나는 딸을 배웅하기 위해 공항대교에 오른 청와대 안보실 행정관(이선균 분)과 대테러용으로 개발된 군사용 실험견들을 이송하는 특수임무를 맡은 군인들과 책임연구원(김희원 분)은 연쇄추돌사고 상황에서 조우한다. 그리고 사고 현장에 누구보다 빨리 도착한 견인차 기사(주지훈 분)까지, 이들은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사고로 파괴된 채 뒤엉켜있는 차량처럼 서로의 입장이 얽히고설켜 내재한 사건의 실체가 드러난다.

극 중 등장인물들 개개의 캐릭터는 다층적이다. 안보실 행정관이라는 직분에 맞게 냉철하게 현장을 수습하려던 주인공은 정작 사건의 실체를 접하고 나선, 다음 대선에 영향을 준다는 정무적 판단하에 진실을 은폐하려고 애쓴다. 돌발적으로 벌어진 사고를 수습해야 할 당사자인 프로젝트 사일런스의 책임자는 현장을 통제하지 못하고 도리어 피해를 가중해 다리가 붕괴하는 원인 제공자가 된다. 현장에 어떤 공적인 시스템보다도 빨리 도착한 견인차 기사는 빌런임을 자처하지만, 생존자들을 구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요즘 빌런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일종의 트랜드로서 아무렇게나 빌런을 붙인다. 그러나 빌런이라고 다 같은 빌런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악당을 의미하는 빌런은 라틴어 빌라누스(villanus)에서 유래됐다, 고대 로마의 농장 빌라(villa)에서 일하는 농민들을 빌라누스라 불렀다. 이들은 구조적인 차별과 곤궁에 시달리다 못해 폭동을 일으킨다. 빌라누스들의 공통점은 핍박받던 과거로 인해 결국 악당으로 변모하게 된 사연을 가지고 있다. 마블 시리즈 등 다양한 콘텐츠에서 빌런은 악당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지만, 엄밀한 의미에선 절대적 악역이라기보다는 다층적 인물로서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등장하는 조커와 같은 캐릭터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견인차 기사는 빌런이 될 수 없다.

사실 견인차 기사는 청와대 안보실 행정관과의 교집합에서 살펴보아야 할 캐릭터이다. 전자가 사적영역에 돈벌이를 위해 차량 구난을 업무로 삼는 사설 업자라면, 후자는 공적영역에서 국민의 안전보장이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국가의 핵심 공무원이다. 그런데 이들은 대형 사고나 자연재해와 같은 재난 상황에 부닥친 피해자들의 처지에선 모두 고맙기 그지없는 가디언들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인명을 구하기보다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구조 자체를 지연하거나 혹은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권력자들의 편에서 사건 자체를 숨기는 데 급급하다면 그 현장은 그야말로 지옥이 되고 말 것이다.

다층적 캐릭터와 마찬가지로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이미 발생한 특정 사건 역시 나비효과의 결과물이자 또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된다. 모든 인과관계가 개별적으로 맺고 끊을 수 없는 세계가 복잡계이다. 교각의 붕괴는 필연적이라기보다는 우연과 우연의 연쇄 과정 속에 발생한 하나의 돌발적 사건이다. 시야가 제로인 상태에서 발생한 추돌사고는 침묵 속에 이뤄진 비밀 프로젝트가 노출되는 계기가 된다. 구조작전은 당연하게도 인명구조보다는 은폐에 공권력을 집중한다.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수행되는 일련의 은밀한 미션들, 그러나 그럴수록 사고는 사건으로, 사건은 사태로 수습이 불가능한 상황에 빠지고 만다.

한편, 재난영화에서 장소성은 매우 독특한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많은 재난영화에서 설정된 공간 자체가 구조적 모순의 총체이자 새로운 출발의 기점이 되기도 한다. 모순을 직시해야만 그 모순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 육지와 하늘길을 연결하는 거대한 다리, 공항대로는 바다 위에 떠 있다. 대한민국은 사실상 섬나라이다. 말 그대로 바다를 통과해야만 해외와 연결된다. 바다를 통해 나가지 않으면 고립된 공간이 바로 우리나라다. 내부로부터 발생하는 구조적 모순은 고립을 가속한다. 내재적 문제가 무엇인지 직시하지 않는다면 고립에서 끝나지 않고 붕괴를 유발할 수밖에 없다.

현대적 의미에서 빌라누스는 1987년 시청 앞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넥타이부대들이다. 대학생들의 시국 시위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본주의 기업사회의 영지에 안착한 그들은 임계점에 달한 상황에서 더 이상 방관자일 수 없다고 판단한다. 곧바로 와이셔츠 차림 그대로 거리로 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고대 빌라누스들과는 달랐다. 폭력행위 대신 구호와 행진을 선택했다. 마찬가지로 2016년 촛불혁명의 빌라누스들 역시 유혈이 낭자한 혁명이 아닌 촛불을 들고 평화로운 축제형식의 정권퇴진운동을 실천으로 옮겼다.

지난 2년의 세월, 특정한 사고가 사건으로 비화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이태원 압사 참사가 그렇고 채해병 사망사고가 그렇다. 어떤 문제로 인해 기어이 사고는 일어났다. 그런데 이를 제대로 수습하지 않고 진실을 은폐하며 궁극의 책임자를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사고는 사건화가 돼가는 형국이다. 이런 일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면 빌라누스들의 인내심은 임계점을 넘어서게 될 것이 자명하다. 만약 그렇다면 시국 상황은 사태로 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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