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투데이가 발로 뜁니다. 아시아에 있는 아시아투데이 통신원들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아시아의 다양한 사람들을 현장에서 직접 만나고 들어본 그들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주변에 없다고 세상에 없는 게 아닙니다. 아시아투데이는 꼭 고위관직자이거나 유명인이 아니어도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특별한 아시아인들의 ‘인간극장’을 담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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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는 그 중심에 있다. 한국전쟁 당시 네 번째로 많은 장병을 파병한 ‘형제의 나라’다. 시간이 오래 흘러 많은 수의 참전용사들이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후손들은 선대의 용맹함을 기억하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터키 남동부에 위치한 카라만마라쉬에서 케밥집을 운영하고 있는 투타쉬 가족도 그 중 하나다.
1931년 카라만마라쉬에서 태어난 후세인 투타쉬는 1951년 입대해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1953년 제대했다. 터키군이 1950년 9월에 참전해 1954년 주력 철수했으니 터키군 참전 기간의 대부분을 함께한 셈이다.
고인의 아내 아이셰 아이크르와 딸 페리 누르 아이크르는 그가 어느 부대 소속이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자랑스러움 만큼은 끝까지 간직했다고 전언한다. 이들 가족이 운영하는 키르벰 레스토랑 한켠에 후세인의 한국 방문 기념사진과 공로 트로피 등을 전시하고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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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 기간 중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한 해프닝도 있다. 전투 후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후세인이 전사했다고 생각한 그의 전우는 후세인 가족에게 편지로 그 사실을 알렸다. 소식을 들은 후세인 아버지는 슬픔과 충격으로 안면 마비까지 겪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된 뒤 후세인은 멀쩡히 살아서 나타났다. 자신이 죽은 줄로만 알고 슬퍼하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면 무사귀환 소식을 편지로 전할 수 없었다. 대신 후세인은 라디오 채널 출연을 택했다. “나는 후세인 투타쉬이다. 나는 죽지 않았다. 나는 살아있다”는 단 세 마디 말에 가족들은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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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인의 기억 속에 먹을 음식조차 찾지 못하고 비참한 삶을 살던 한국인들은 전쟁 위기를 극복하고 참전용사들에게 보답하는 여유를 찾았다. 후세인도 2015년경 국가보훈처의 초청으로 한국 땅을 다시 밟았다. 아내는 “남편은 자신이 싸웠던 장소들을 재방문했다. 사격장에서 사격을 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1등을 했다며 상도 받아왔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다른 가족들은 아직 한국을 방문한 경험이 없다. 하지만 아버지·남편이 항상 한국과 한국전쟁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에 한 번 가보지 못한 한국의 추억 속에서 살았다. 후세인이 격렬한 전투를 벌였던 지역에 대해 인터넷으로 조사하고 토론하기도 했다.
안타깝게 후세인은 2017년 10월 교통사고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투타쉬 가족은 현재 주변에 생존한 참전용사가 더는 없다고 증언했다. 투타쉬 가족은 “한국과 터키 사이의 강한 유대감은 계속해서 지속되기 바란다. 순교자이자 ‘가지(이슬람 문화에서 성전에 참전한 경험을 가진 사람에게 주는 칭호)’가 된다는 것은 우리 문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버지가 한국 참전용사였다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럽고 기쁘다. 한국에 있는 우리 형제들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의 기억을 지켜주시기 바란다”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