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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현지시간) 부르사 하키미옛 등 터키 언론들은 한 마트에서 벌어진 폭행 사건을 보도했다. 사건은 남편과 함께 쇼핑을 나온 한 여성이 남성 계산원에게 할인 품목을 물으면서 시작됐다. 계산원은 ‘마스크·샤워젤·생리대·찻잔 세트·치약·칫솔’이라고 답했고 여성은 답변에 만족했다. 그러나 해당 여성의 남편은 달랐다.
남편은 여성을 호칭하는 터키어 ‘bayan(바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너는 (남자이므로) 여성에게 생리대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따졌다. 이에 대해 계산원은 ‘여성’을 뜻하는 또 다른 단어인 ‘kadin(카든)’을 사용하며 “우선 ‘바얀’이 아니라 ‘카든’입니다”라고 응대했다. 이에 화가 난 남편은 욕을 하며 계산원을 폭행했다.
△남성이 여성에게 여성용품을 언급하는 것은 수치?
월경은 여성의 신체에 일어나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 중 하나이고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터키에는 여전히 월경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사회에 깔려있다. 계산원의 역할은 할인 품목을 고객에게 알려주고 원하는 경우 구매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고 이번 사건에서도 계산원은 정당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가해자인 남편은 다른 남성이 자신의 아내에게 생리대에 대해 언급한 것이 모욕적이라고 여긴 것이다.
△‘여성’을 뜻하는 단어에 대한 인식 차이도
그런데 사실 이 사건에는 조금 더 복잡한 사연이 숨어있다. 폭행 사건이 일어난 직접적인 계기는 계산원이 가해자 남성의 아내를 칭하는 단어를 ‘카든’으로 정정했기 때문이다. 각 단어의 원래 뜻과 터키어 언어 체계로 보면 당시 대화에서 ‘부인’·‘여사’ 등 여성에게 사용하는 존칭을 뜻하는 ‘바얀’ 대신 여성이라는 성별을 뜻하는 ‘카든’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맞다.
그러나 터키 현지에서는 자주 원래의 뜻에서 벗어난 ‘바얀’을 여성을 지칭하는 대명사처럼 사용한다. 일례로 화장실을 구분할 때에도 ‘바이’·‘바얀’이라고 적어두는데, 이를 한국어로 하면 ‘씨’·‘여사’라고 적는 것과 다름없어 매우 어색한 표현이다.
이렇게 ‘바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공손한 표현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는 까닭은 ‘카든’이 소녀를 벗어난 성숙한 여성을 표현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결혼이나 성관계 여부, 혹은 가능 여부의 의미로 여겨지면서 남성에게 성적 긴장감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일부 터키인들은 여성을 ‘카든’이라 칭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남성을 대상으로도 소년과 성숙한 남성을 구분하는 단어가 있지만 이는 아무런 논란 없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즉 단순히 여성을 뜻하는 단어에 관해서는 생물학적 정의를 넘어선 담론적 정의가 내려지는 반면 남성 호칭은 모든 부정적인 의미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이에 터키 온·오프라인에서는 오래전부터 여성을 성적 정체성에서 배제하는 단어 사용을 지양하자는 입장과 해당 논쟁이 과장된 페미니스트적 태도라는 입장이 대립해왔다. 일찌감치 터키에서는 ‘세계 여성의 날’이나 ‘터키 여자 농구 리그’ 등의 단어에 ‘바얀’ 대신 ‘카든’을 사용하도록 했지만, 여전히 ‘바얀’·‘카든’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일부에게는 ‘카든’ 단어 사용이 극도의 수치심을 유발하며 폭력까지 행사할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언어는 대중의 인식을 반영하는 동시에 대중의 인식을 만들어낸다.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억압하는 터키 사회의 인식이 ‘바얀’·‘카든’ 논쟁을 만들어냈고, 이런 언어 문화가 다시금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를 만든다. 폭행 피해를 입은 계산원은 가해자에게 “이것이 이 나라의 유산”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바얀’·‘카든’ 논란은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남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