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특별기고] 삼권분립과 무기력증에 빠진 행정부의 치유책은?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koreanwave.asiatoday.co.kr/kn/view.php?key=20231129010019370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3. 11. 29. 18:21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2023110101000158100007481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최근 우리는 입법부의 횡포와 사법부의 독단으로 행정부가 무기력증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근대 자유민주주의는 최선을 성취하기보다는 최악을 막기 위해 마련된 제도다. 자유 민주주의의 건축가들은 폭정 혹은 독재체제라는 최악을 막는 것이 정치적 삶의 목적이었다. 그들은 정치가 최고 목적의 추구를 금지하고 하나의 원칙으로서 최고의 것에 대한 합의를 생각하는 것조차 금지했다. 그들은 최고의 것에 관한 합의는 원칙적으로 성취될 수 없다고 간주했다.

그들은 최고 목적의 깃발을 정치에 끌고 들어가는 사람이나 정당은 누구든 어쩔 수 없이 정파적 투쟁을 벌이고 이들의 승리는 폭정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최악의 폭정화를 막기 위해 마련된 제도가 바로 삼권분립제도다. 삼권분립 제도는 근대 자유민주주의 정치제도의 하나의 전형이다. 그것은 16세기 피렌체의 마키아벨리가 암시하고 17~18세기 프랑스의 몽테스키외가 이론을 체계화하고, 미국의 국부들이 신생 합중국을 위해 채택하여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중단 없이 작동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정부조직 형태다. 이 미국의 민주정부조직은 지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전 세계에 영향력을 미친 소중한 제도다. 대한민국도 현제 제6공화국 헌법에서 여전히 이 삼권분립의 정부조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삼권분립의 교리는 18세기 근대의 유형으로 등장했을 때 그것은 즉시 정치적 의도와 정치적 사실 사이의 갈등에 직면했다. 그것의 정치적 의도는 서로가 독립적이고 완전히 평등한 것으로 조정된 정부의 3부 속으로 용해함으로써 군주의 절대 권력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권력분립의 교리가 여기에서 멈추었다면, 홉스와 칸트가 분명하게 인식했던 것처럼, 그것은 필연적으로 국가 그 자체의 소멸로 이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권력분립의 제도하에서조차 최고의 정부권력인 주권적 권력은 어디엔가 살아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3개의 분리된 권력에 제4부인 주권적 권력을 추가함으로써 그리고 3부 중 하나를 다른 부들 위로 높이고 그것을 주권의 대변자로 만들었다. 군주제에서 권력분립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그것들을 동시에 중립화함으로써 이 제4부는 군주였다. 미국과 1789년의 프랑스와 같은 민주정치제도에서 그것은 헌법을 통해 말하는 국민이었다. 그리하여 군주제하에서 다른 부서 위에 올려진 부서는 영국을 제외하곤 행정부다. 그리고 대의민주주의에서는 입법부다.

그러나 전시엔 매일 직접 전쟁을 수행하는 행정부가 우위에 서게 된다. 실제로 미국의 역사에서 대통령의 권한이 제왕적으로 나타난 것은 남북전쟁을 치른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때였다 그는 헌법에 규정된 전쟁법안(the war power act)을 통해 행정부의 주도로 입법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전쟁의 종결과 제왕적 링컨 대통령의 사망으로 의회가 다시 우위를 되찾았다. 평화 시 미국에서 제왕적 대통령의 효시는 20세기 초 1901년 7월 전임 대통령의 피살로 우연히 대통령직을 계승한 제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 시절이었다. 미국은 19세기 말경에 산업화의 절정에 도달했다. 대기업들의 카르텔이 국가의 공적 이익과 공정성을 위반하고 비리가 심각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미국의 전임 대통령들은 헌법이 허용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소극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대통령이란 헌법이 구체적으로 금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헌법 해석의 적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리하여 연방정부 대통령이 자유로운 경제와 기업 활동에 간섭할 수 없다는 오래된 자유방임경제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정의와 공정의 이름으로 경제와 기업 활동에 제약을 가하고 노동조합 활동을 조성하는 행정부 중심의 소위 진보주의적 정책을 최초로 실시하여 제왕적 대통령의 모습을 보였다.

그의 이런 진보주의 정책의 시발은 그 후 제33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그리고 1960년대에 제26대 린든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의 건설로 미국을 진보적 복지국가로 변화시켰다. 그들은 행정부의 적극적 주도로 국정을 이끌어 재임 시 모두가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헌법질서는 제1공화국의 수립 때부터 헌법상 삼권분립의 완전한 미국식 대통령제가 아니라 거기에 유럽식 내각책임제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제2공화국 내각책임제의 처참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대통령제를 선택한 제3공화국 헌법도 현대 민주 정당정치의 발전을 위해 그런 요소를 포함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질적인 두 제도 간의 충돌로 각각의 장점들이 성공적으로 융합하여 상승효과를 가져오기는커녕 오히려 두 제도의 단점들만 부각되는 어이없는 정치투쟁의 결과들이 한국정치사를 수놓게 됐다. 그리하여 한국인들은 1948년 건국 이후 소위 제왕적 대통령(imperial president)이 주도하는 권위주의적 통치를 유지하거나 아니면 여소야대 정당중심의 의회가 대통령과 행정부의 국정운명을 사실상 마비시키는 입법부 독재정치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것은 일찍이 토크빌이 경고했던 "다수의 폭정(tyranny of majority)"이었다. 대한민국이 1953년 세계최빈국에서 21세기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게 된 것은 대체로 활기찬 제왕적 대통령들이 이룬 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국회가 행정부에 우위를 차지하면 거의 언제나 행정부가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국민들은 직접투표권을 행사했지만 그들이 선출한 대통령은 효과적 통치에 필요한 권한들을 갖지 못했다.

거대야당과 대중의 여론이 정부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곳에서는 진정한 주권적 정치권력의 기능에 병적인 장애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런 병적인 장애는 정부를 허약하게 만들어 통치능력을 거의 마비상태로 몰고 간다. 이런 헌정질서의 붕괴는 민주사회의 재앙적 몰락의 원인이 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입법부가 당연히 행정부가 일할 기회를 박탈하여 행정부가 국가를 운영해갈 수 없게 된다. 그렇게 국가의 운영이 마비되면 국민은 자유와 권위 중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저명한 공공철학자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n)이 일찍이 주장한 것처럼, "국민들은 동족상잔을 위협하는 자유보다는 아버지 같은 권위를 선택할 것이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어떤 이상도 그들이 통치되는 방식에 오랫동안 방해되도록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이런 방식으로 생명력 없는 정치질서로서 민주주의의가 바로 그 무기력증의 해결책의 하나로 전체주의를 가져왔다.

오늘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 것은 프랑스대혁명 시 자코뱅(Jacobin)당 유형의 위협과 유사하다. 국회의원들은 국가의 악을 제거하기보다는 국가 그 자체를 파멸시키려고 한다. 게다가 신-봉건주의(a new feudalism)적 탈산업사회의 새 계급들이 국가의 공권력을 위협한다. 거대기업들은 중세 유럽사회의 귀족계급처럼 그리고 노동자 집단은 과거 성직자 계급처럼 행동한다. 무책임한 언론을 포함하여 각종 근대의 사회단체들은 사적인 이익을 앞세워 국가의 공권력을 무시한다.

이런 병든 형태의 민주주의에 대한 올바른 치유책은 행정부가 강력하게 국가정책을 주도하는 것이다. 국회의 결정은 다양한 이해관계의 "타협"을 대변한다. 그러나 행정부는 증거와 상담을 받은 뒤 대통령 스스로 "올바른" 결정을 하는 곳이다. 상담자들과 보좌진들은 정책결정의 참여자가 아니라 정책결정자의 비서들이다. 비서들이 설치는 것은 과거 왕조시대 내시들이 설치는 것과 같다. 그들은 그림자에 머물러야 한다.

오늘날 치열한 국제사회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고 또 앞서가기 위해서는, 즉 국제적 파도타기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주권을 실제로 행사하는 대통령이 선장으로서 그리고 국민 교사로서 직접 국민 앞에 나서 국민 여론을 조성하고 압도적으로 끌고 가야 할 것이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본란의 기고는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

댓글 작성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