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특별기고] 대한민국의 보안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 군인-정치가의 리더십(I)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koreanwave.asiatoday.co.kr/kn/view.php?key=20240207010004005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02. 07. 17:54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강성학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는 6·25전쟁의 휴전을 앞두고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의 필사적 요구에 결국 1954년 한미동맹조약을 체결해 준 미국의 제34대 대통령이었다. 그의 전임자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건국과 북한 및 중국 공산주의세력의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구원한 일종의 "대부"였다면(필자의 <해리 S. 트루먼: 평범한 인간의 비범한 리더십> 2012, 박영사, 479쪽 참조)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잿더미에서 불사조처럼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지난 70년간 대한민국의 안전을 보장해 준 "보안관"이었다. 한미동맹체결은 초강대국 미국이 거의 일방적으로 지구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약소국 대한민국을 보호하겠
다고 약속하고 실천한 세계사에 아주 드문 경우였다. 그것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철저한 반공(反共)주의자였기에 가능했다. 한국인들은 대한민국의 안전을 그렇게 오랫동안 보장해 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대해 그동안 정치적으로나 학술적으로나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그에게 미안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그를 잊힌 기억 속에서 이제라도 새롭게 되살려 그를 기릴 필요가 있다.

아이젠하워는 링컨에 관해 읽기를 좋아했으며 링컨의 주요 연설문에서 주요 어록들을 가슴속에 담았다. 전쟁사에서 그는 남북전쟁 때 남부 총사령관 로버트 리(Robert E. Lee) 장군의 어록을 인용하는 걸 좋아했다. 그것들 중에서 "의무란 영어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는 말은 리 장군의 핵심적 어록이었다. 그에겐 암기식 학습이 법칙이었다. 코칭(coaching)에 대한 그의 재능은 아주 잘 이용되었으며 팀워크(teamwork)에 보다 헌신적이 되었다. 팀워크는 그의 생활철학의 두드러진 부분이었다. 아이젠하워는 미국 육군사관학교(West Point)의 생도생활을 즐겼다. 그의 무릎상처로 그는 기병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육군 소위로서 1915년 텍사스주의 포트 샘 휴스턴(Port Sam Huston)의 보병으로 가게 되었다. 1925년 참모학교(Staff School)에 보내졌다. 아이젠하워는 참모학교를 사랑했으며 그는 다음 해에 1등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1926~1927년에 잠시 제24보병의 제2 대대장직을 수행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미 육군대학의 후원하에 미 전투기념위원회(the American Battle Monuments Commission)에서 복무한 뒤 워싱턴 DC로 갔으며, 다시 파리의 본부로 전보되어 1928~1929년을 보냈다.

그의 다음 근무지는 그의 탁월한 행정능력을 인정받아 워싱턴 DC에서 전쟁 차관보의 행정 부관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전쟁부(the War Department)의 심장부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1929년 11월부터 1933년 2월까지 복무했다.

1932년 1월 육군참모총장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이 그를 수석 부관에 임명했다. 맥아더 장군은 군에서 퇴역하면서 자치정부를 준비하는 필리핀에서 필리핀의 군대를 창설하도록 임명되었다. 이때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이젠하워는 맥아더를 위해 8년 동안 일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항상 불안했다. 그는 마침내 1939년 12월 유럽에서 전쟁이 시작된 후 필리핀을 떠났다. 그는 이미 1936년 7월 1일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1940년에 와서 그는 육군에서 가장 경험 있는 참모장교들 중 한 사람으로 널리 인정받았다. 그는 부대를 지휘한 적이 없었지만 그러나 항상 활동적이었다.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과 진주만 공습이 있었던 1941년 12월 사이에는 어떤 미국 육군 부대도 전투에 종사한 적이 없었으며 전쟁을 경험했던 장교들은 한 세대나 지나갔다. 1940년 아이젠하워는 워싱턴주의 포트루이스(Port Lewis)에 기지를 둔 제3보병사단의 참모장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그 요새에서 육군 9군단으로 이동하여 후에는 텍사스주의 샌 앤토니오(San Antonio)에서 미 육군 제3군의 참모장이 되었다. 그사이에 그는 대령을 거처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러한 변화들은 그를 육군 참모총장인 조지 마샬(George C. Marshall Jr.) 장군에게 좀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다. 마샬 장군은 아이젠하워 준장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으며 이미 전쟁 시 잠재적 승자로 점을 찍어 두었다. 이 점에서 마샬은 맥아더 장군에 동의했다. 맥아더는 미국이 큰 전쟁에 참가한다면 아이젠하워가 예외적으로 잘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는데 마샬도 그랬다. 유럽에서 전쟁의 발생과 함께 아이젠하워와 마샬 육군 참모총장은 필연적으로 더욱 가깝게 되었다. 왜냐하면 마샬은 육군참모총장이고 아이젠하워는 육군에서 최고의 참모장교였기 때문이다. 진주만 피습 직후 1941년 12월 12일 아이젠하워 장군은 최대한 빨리 마샬 육군 참모총장에게 출두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1941년 12월 14일 전쟁부에서 마샬 장군에게 출두했을 때 마샬 장군은 급속히 악화되어 가는 상황을 설명하고 무엇이 일반적 행동노선이 되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아이젠하워는 몇 시간을 달라면서 자세한 계획을 작성하겠다고 대답했다. 그 후 아이젠하워는 답변서에서 미국의 전진기지로서 호주의 중요성을 파악했고 필리핀은 구할 수 없을 것이지만 노력은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나머지 아시아 지역은 실패하겠지만 포기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샬은 아주 차가운 시선을 보였다. 마샬은 보좌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이젠하워는 그 자리를 수락했고 마샬 장군이야말로 이상적인 상관임을 발견하고 그를 스승으로 간주했다. 1942년 3월 말에 아이젠하워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해 500만명의 병력을 내다보는 전쟁계획의 수장이 되었다.

일본에 비교하여 미국 산업기지의 압도적이고 신속한 확장능력을 고려하여 미국은 시간과 기초적 상식으로 태평양에서 승리할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그는 마샬 장군처럼 유럽에 우선순위를 두는 최고위층의 결정을 충심으로 인정했다. 1942년 말 마샬 참모총장은 이제 점증하는 병사들이 도착하는 전장에서 미군을 책임지고 지휘하기 위해 아이젠하워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작전을 위한 훈련의 전문가인 마크 클라크 장군과 함께 처칠 영국 수상을 방문했으며 처칠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처칠은 그들은 훌륭한 미국의 젊은 장군들이라고 말했다.

이때는 러시아에 대한 나치 독일의 압력을 완화시킬 무엇인가를 할 절대적 필요성이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the Battle of Stalingrad) 때까지 러시아가 히틀러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것이라는 어떤 보장도 전혀 없었다. 러시아 몰락의 진정한 두려움이 1942년 연합국 전략적 주장의 배경이었다. 마샬 장군의 신호를 받아 아이젠하워와 그의 동료들은 북서부 유럽에 대한 이른 공격을 주장했다. 그러나 처칠 수상과 영국의 육군 참모총장인 브룩(Brooke) 장군이 그것은 재앙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 단계에서 아이젠하워는 지중해는 사이드 쇼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괴멸의 모험을 하지 않고 미국군이 독일군을 잡고 또 전투경험을 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미국인들에게 결국 대서양 공격을 준비하는 데 불가결한 전투경험을 줄 지중해 공격은 저항할 수 없는 주장이었으며 결국 토치 작전(Operation Torch)의 형식을 취했다. 이것은 모로코, 알제리 그리고 튀니지에 영-미-캐나다 군의 계속될 상륙과 이집트에서 몽고메리(Montgomery) 장군이 이끄는 제8군의 상륙이었다. 토치 작전의 초기 단계들은 6월 24일 런던에서 타결되었다. 다음 날 아이젠하워는 아주 성공적인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것은 그의 최초 기자회견이었는데 그로 인해 그는 세계적 인물로 등장하였다. 그 때 아이젠하워의 나이가 51세였다. 1942년 10월 23일 엘 알라메인(El Alamein)에서 아프리카의 협공이 롬멜(Rommel)의 아프리카 군단에 대한 몽고메리 장군의 공격으로 시작했다. 2주간의 치열한 전투 후에 11월 4일에 롬멜은 총퇴각했다. 4일 후에 토치 상륙작전이 시작됐다. 그것은 역사상 지금까지 가장 대규모의 상륙작전이었다.

토치 작전은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비록 상륙은 잘 진행되었지만 최종 1만7000명의 영국과 영연방군이 사상했으며 1만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그랬다. 죽은 독일인들의 수는 겨우 8500명 정도였다. 그러나 5월 7일 카프 본(Cap Bon)에서 독일인들이 항복했을 때 16만6500명의 독일군 포로, 6만4700명의 이탈리아인 포로, 200대의 독일탱크와 1200문의 포들이 연합국 손안에 들어왔다. 이것은 전(全) 전쟁을 통해 최대 전과였으며 대가는 적었지만 그 규모에선 스탈린그라드의 승리와 맞먹었다. 용기와 이성을 잃지 않은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유럽에서 최초의 결정적인 연합국의 승리가 돌아갔다. 처칠은 이것을 "운명의 가장 큰 돌쩌귀"라고 불렀다.

아이젠하워의 다음 목표는 시실리에 대한 작전으로 이탈리아를 전쟁에서 제거하는 것이었다. 7월 10일 시실리에 상륙하여 7월 22일 팔레르모(Palermo)가 점령되었다. 시실리는 쉬어보였다. 7월 24일 팔레르모의 함락에 대한 반작용으로 무솔리니(Mussolini)가 파시스트당 대협의회에서 예상 못 한 패배를 당했다. 왕 빅터 엠마누엘 3세가 피트로 바도글리오(Pietro Badoglio) 원수에게 새 정부를 구성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아이젠하워는 바도글리오 원수와 비밀협상을 벌여 이탈리아를 구축국 대열에서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아이젠하워는 1943년 9월 3일 자신감을 가지고 이탈리아의 본토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5일 후 살레르노(Salerno)에서 아이젠하워 장군은 이탈리아의 무조건 항복을 발표할 수 있었다. 북아프리카에서 엘 알라메인과 스탈린그라드에서 연합군의 승리로 전쟁의 흐름이 히틀러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1943년 지중해에서 나치를 축출하는 작전과 쿠르스크(Kursk)의 큰 탱크 전투는 히틀러가 더 이상 전쟁에서 이길 수 없으며 그는 이제 어떤 합리적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명백한 신호들이었다. 그러나 연합국은 오직 독일의 무조건 항복에 합의했다.

아이젠하워는 이미 그 조건을 이탈리아에 부여했으며 1943년 9월 3일 그것이 수락되었다. 무조건 항복의 조건은 본질적으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아이디어였으며 윈스턴 처칠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는 그 무조건 항복의 원칙에 동의했다. 아이젠하워는 히틀러 정권을 절대적 악으로 간주했다. 노르망디의 전투는 역사에서 그의 핵심적 순간이 될 것이다. 마샬과 부룩 장군들과는 달리 아이젠하워는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rd)의 필요성을 100% 믿었다. (계속)

※본란의 기고는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

댓글 작성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