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칼럼] 6월 1일 의병의 날, ‘見利思義 見危授命’ 정신 기린다!

[칼럼] 6월 1일 의병의 날, ‘見利思義 見危授命’ 정신 기린다!

기사승인 2024. 05. 30. 18:33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류석호
류석호 칼럼니스트, 전 조선일보 영국특파원
경북 안동은 한국 독립운동의 출발지이자, 전국에서 독립유공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

1894년 7월과 9월 사이 안동을 중심으로 한 전국 최초의 항일의병인 갑오의병(甲午義兵)이 현재 안동시청 자리에서 첫 저항의 기치를 내걸었다.

1894년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해 국권을 무너뜨리는 갑오변란을 일으키자 유생 서상철은 안동 일대에 의병 궐기를 호소하는 포고문을 발송하고 같은 해 9월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왕의 밀령이 전달되자 2000여명의 의병을 모아 일본군 병참부대가 있던 상주 함창의 태봉을 공격했다. 이는 전국 의병항쟁의 시초로 이후 51년간 이어지는 한국독립운동사의 시작점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이어서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전개된 을미의병(乙未義兵) 역시 안동이 중심지가 되었다. 을미의병의 주도자 중에는 이상룡(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의 스승 김흥락도 들어 있었다. 또한 안동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391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며 이상룡, 류인식, 김동삼, 이육사, 김시현, 김지섭 등 구국에 헌신한 수많은 순국지사와 독립지사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류인식, 김동삼 선생은 이상룡 선생과 함께 1907년 안동에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을 통해 애국심과 민족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세계 여느 사례와 비교해도 부족함 없는 우리 선조 이야기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기간 경상도 안동에서 창의(倡義), 6부자와 동생 등 7명이 전투에 참가한 포의지사(布衣之士) 기봉(岐峯) 류복기(柳復起 1555~1617, 증직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일가족의 의병활동 및 기민(飢民) 구휼(救恤) 사례는 선비정신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준다. 류복기는 1592년 임란(壬亂)이 일어나자 올곧은 선비의 뜻을 세워 "이 몸의 죽음을 어찌 아까워하겠는가?"(身死何惜·신사하석)하면서 6월 1일 안동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일가족이 모두 구국 전장(救國 戰場)에 나선 예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매우 드문 일로, 특히 다섯째 아들 의잠(宜潛)은 부형(父兄)을 따라 열 살에 안동에서 140여㎞ 떨어진 '홍의(紅衣)장군'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가 이끄는 창녕 화왕산성(火旺山城 600m 고지) 방어전에 자원해 척후 및 연락병으로 활약했다.

류복기와 장자 우잠(友潛) 등 10대의 다섯 아들, 그리고 아우 묵계(墨溪) 류복립(柳復立 1558~1593, 진주성 싸움에서 외삼촌 학봉 김성일과 함께 순절, 증직 이조판서) 등 7명은 대구시 망우당공원의 〈임란호국 영남 충의단〉에 위패(位牌)가 모셔졌다. 이곳에 봉안된 315위의 위패 가운데 한 집안에서 7명의 위패가 봉안된 경우는 유일하다.

정부는 이들의 우국충정과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16년 10월, 35억원의 예산을 들여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아기산(鵝岐山) 자락에 기산충의원(岐山忠義院)과 안동충의역사체험장을 개원했다. 그 기산충의원은 안동지역의 대표적 의병기념공간이다.

해마다 의병의 날인 6월 1일 오전, 이곳에서 안동시장과 시의회 의장, 문화원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선비정신으로 나라를 구한 기봉 류복기 일가족 7의사의 위국충정(爲國衷情)을 기리는 의병의 날 기념행사가 열린다. 행사 참가자들은 특히 '임하호(臨河湖) 호국둘레길'을 돌며 나라와 겨레사랑의 의병정신을 가슴에 새기게 된다.

'의병의 날'은 의병의 역사적 가치를 일깨워 애국정신을 계승하고자 임진왜란 당시, 홍의(紅衣)장군 곽재우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2010년 5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매년 '호국 보훈의 달' 첫째 날인 6월 1일로 정했다. 올해로 14회째를 맞았다.

'의병(義兵)'이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징발 명령과 관계없이 자발적으로 종군하여 전쟁에 참여하는 자위군(自衛軍)에 해당한다. 의병의 전통은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의병이라 하면 임진왜란과 20세기 전후의 항일 의병을 일컫는다.

의병이 가장 크게 일어났던 때는 조선 임진왜란, 병자호란 시기와 구한말(대한제국)이며, 특히 임진왜란 초기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의 수는 관군(官軍)을 능가했으며 관군이 대응하지 못하는 사이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구한말에는 일제 침략에 맞서 제1, 2차 의병 항쟁이 일어났다. 제1차 의병 항쟁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1896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선포되면서 일어났다. 제2차 의병 항쟁은 러·일 전쟁이 끝날 무렵 일어나 이후 대규모 항일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요즈음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총체적인 아노미(anomie) 현상이 극에 달해 어느 것 하나 반듯한 게 없는 지경이다. 사회 규범과 가치의 붕괴가, 사람들의 윤리의식이 이렇게 바닥을 친 적이 있었던가.

참으로 오래된 공자님 말씀이지만,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글귀가 새삼 절실하게 다가온다. '이익을 보면 의리를 먼저 생각하고, 위급함을 보면 목숨을 던진다'는 죽비 같은 경구다. 의병은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생각했을 뿐 개인의 영달이나 소속집단의 존재만을 의식하지 않았다. 의병과 독립운동가의 거룩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의병정신은 선비정신과 다를 바 없다. 조선시대 사림과 선비를 오늘날 한국사회에 대응시킨다면 아마도 양심적이고 공정한 지식인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같은 상황이 되었을 때, 우리의 선조들이 했던 대로 할 수 있을까? 도대체 과거의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일까?

우리가 맞닥뜨린 커다란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과거가 외치는 사실들에 귀 기울여야 할 때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류석호 칼럼니스트, 전 조선일보 영국특파원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