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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토마스 제퍼슨: 모순된 영혼의 미국 첫 철인-대통령

[강성학 칼럼] 토마스 제퍼슨: 모순된 영혼의 미국 첫 철인-대통령

기사승인 2024. 07. 3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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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미국의 혁명사상가 토마스 제퍼슨은 "우리는 이런 진실들을 자명하다고 간주한다. 즉 모든 인간들이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시작하는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서의 핵심적 55개의 단어들을 썼다. 그것은 미국의 역사에서 마법과 같은 단어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약속과 그 단어들은 아마도 미국의 역사에서, 아니, 근대의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일 것이다.

그리하여 1874년 그의 전기 작가인 제임스 파턴(James Parton)은 "제퍼슨이 틀렸다면, 미국이 틀렸다. 만일 미국이 옳다면, 제퍼슨이 옳았다"고 썼다. 바로 그 미국의 제3대 미국대통령이 된 토마스 제퍼슨은 키가 크고 부드러운 말씨를 가진 버지니아의 대지주였다. 그는 포도주를 사랑했고 그가 수집한 엄청난 분량의 책은 미국의회도서관의 핵심이 되었다. 그는 감정이 무디지 않았지만 사심이 없는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열정적이면서도 다소 규정하기 어려운 복잡한 인물이었다. 제퍼슨의 영혼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모순으로 가득했다. 그가 썼던 거의 모든 것이 어느 시점에서 그가 행한 어떤 것에 의해서 부인되었다. 우선, 인간 평등의 예언자인 그는 노예들을 소유했으며 더 나아가 한 여성 노예와 적어도 한 명의 자식을 두었다.

둘째로, 신문이 없는 정부와 정부가 없는 신문을 택해야 한다면 그는 정부 없는 신문을 선호하는 데 일순간도 주저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그가 개인적으로는 국가 관리들에게 자기의 대통령직에 비우호적이 편집자들에게 폭동을 선동한다는 명예훼손죄를 적용하라고 촉구했다.

셋째로, 작은 연방정부를 주창하고 또 상비군을 반대했던 그가 루이지애나 지역을 구매함으로써 미국국토의 크기를 한 방에 배로 늘렸으며 완전히 새로운 전투력인 미국의 해병대로 무슬림 해적들과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제퍼슨의 그런 비일관성은 위선이 아니었다. 제퍼슨의 행동들이 그의 높고 또 때로는 비현실적인 원칙들을 위반했다면 오늘날 우리의 행동들도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을 역시 위반하고 있다.

제퍼슨이 염원했고 또 그가 도입하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던 것은 평화로운 공화정이었다. 즉, 제퍼슨은 그것들이 통상적이든 집안일이든 혹은 종교적이든 간에 법적으로 그들의 문제에 간섭하지 않는 검약하고 간소한 정부하에서 살아가는 어느 정도 번영하고 고도로 교육받은 독립적인 신사-농민의 집합체를 상정했다.

그리고 그는 대외적으로는 외국과 얽히는 것을 확고하게 저항했다. 제퍼슨은 자기의 아이디어들을 후세에 남겼다.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것들은 정치와 종교의 완벽한 분리를 주장했고 또 돈이 권력과 유착한 사악한 토착 귀족의 등장을 의심했다. 어떤 것들은 기이하고 공상적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각 세대가 자신의 정부를 수립할 수 있도록 매 19년마다 헌법이 개정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한 어떤 아이디어들은 당시에 상당한 사람들에게 혐오스러웠다. 예를 들어, 그는 흑인들이 백인들에 비해 정신적으로 열등하다는 비과학적인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아이디어들은 그가 기록하는데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에 무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제퍼슨은 세상을 말로 지배하길 원했다. 그는 자기의 말을 통해 미국의 역사와 정치를 지배하려고 했다. 그는 견제와 균형, 평등과 자유, 그리고 언론의 자유가 무엇인지에 관해서 주장했다. 그의 언어 구사력은 진정으로 미국의 지적, 정치적 그리고 철학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제퍼슨도 역시 행동하는 인간이었다. 1790년대 그는 미국의 독립혁명이 그의 내각 동료인 연방주의자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의 주도하에 인민의 권리와 이익이 배신당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정치적 소동이 일어났다. 제퍼슨은 자기의 견해를 파급하기 위해서 우호적인 신문사를 설립하고 지원했다. 그와 그의 협력자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은 자기의 정적들을 공격하고 영향력 있는 연합체를 이루어 그가 소위 "귀족들과 독재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했다. 그의 저돌적인 행위와 해밀턴의 행위는 마침내 합의를 사랑하는 워싱턴 대통령의 공식적 질책을 받았지만 그러나 제퍼슨은 물러서지 않았다.

1801년 그가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때 그는 일종의 미국의 첫 철인-대통령(a philosopher-President)이었다. 그 시절에 지식은 지금처럼 전문분야로 세분화되지 않았다. 제퍼슨 간은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모든 것이 연계되었다. 자연세계의 관찰도 인간세계를 위해 깊은 함축을 갖고 있었다. 두 영역은 창조주로부터 오는 항구적이고 합리적인 법칙에 복종했다. 그것들은 왕들의 기분에 달려있지 않았고 계급이나 민족성에 예외를 두지도 않았다.

제퍼슨이 일찍이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혁명의 끝자락에서 휘청거리는 군주제를 목격하면서 아주 깊숙이 혼합된 감정을 경험했다. 그는 프랑스 와인을 좋아했고 건축물에 경외감을 느꼈지만 거만하고 방자한 귀족은 그에게 혐오감을 주었다. 혁명의 초기 봉기에 따른 무차별적이고 소란한 폭력은 자유의 대가에 관해서 생각하게 했다. 제퍼슨은 탄압을 증오하고 자유를 인류의 자연적 성향이라고 간주했다.

1912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제퍼슨의 원칙들이 순수이성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여망, 충동, 비전, 동정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 빛의 원천들이다. 그것들은 심장을 열정으로 불태운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퍼슨은 대외정책에서 20세기의 우드로 윌슨과 아주 달랐다. 그는 워싱턴의 규칙(Washington's Rule)에 따르는 고립주의자의 본능을 갖고 있었다.

제퍼슨은 프랑스와 영국을 모두 변덕스러운 군주제들로 간주했다. 미국이 국제적 갈등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미국의 순전히 물리적 거대함과 지리적 불침투성에 대한 그의 낙관적 이미지에 기초했다. 물론 거리는 그때 이후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미국의 인구는 미국의 무한한 자원을 결코 압박하지 않을 것이라는 제퍼슨의 생각은 이제는 비웃음을 살 만큼 근시안적이다. 더구나 자기의 고향 버지니아가 외국의 석유에 의존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글로벌 경제가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퍼슨 시대 이래 어떤 것은 바뀌지 않았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시민생활에서 종교의 역할에 관한 미국의 계속되는 투쟁이다. 인민의 종교적 신앙에 정부의 간섭을 금지한 종교의 자유를 위해 버지니아의 법률을 만들었던 제퍼슨은 이 점에서 강경노선을 취했다. 따라서 공립학교에서 기도에 관한 현재의 논쟁에서 그가 어느 편에 설지를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만일 헌법에 하나의 분야가 있다면 그것은 정교의 분리다. 제퍼슨은 정교의 유착은 양측을 모두 부패시키고 개인적 마음의 자유를 위태롭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만일 제퍼슨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그는 현대정치의 괴물 같은 복잡성과 비용에 경악할 것이다. 1800년에 그가 대통령에 처음으로 출마했을 때 선거인단과 하원이 대체로 선거를 결정했다. 당시엔 오늘날과 같은 선거운동은 별로 없었다. 끝없는 홍보, 과시적 전당대회 그리고 빡빡한 여행은 대중연설을 부담스러워했던 수줍은 제퍼슨을 물리쳤을 것이다. 그를 비롯한 미국의 국부들은 후보자들이 투표를 구걸하는 것을 본다면 공포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제퍼슨도 대통령이 되자 제한정부에 대한 그의 견해도 그의 강력한 권한의 사용을 막지 못했다. 그것의 합법성을 스스로 의문시했지만 실질적 이익을 저항할 수 없었던 루이지애나 영토의 구매 후에 그는 미국의 드넓은 황야에 대한 정치적 지배를 대담하게 주장했다. 제퍼슨에게 자유의 진전은 스스로 발생하는 어떤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밀어붙여야 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실제로 밀어붙였다.

오늘날 항상 그의 행동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의 아이디어들은 보다 자유롭고, 공개적이고, 합리적이고 그리고 공정하게 작용할 미국의 잠재력을 항구적으로 상기시키는 데 봉사할 것이다. 토마스 제퍼슨은 인습적으로 종교적 의미는 아니지만 신념의 사나이였다. 그는 어떤 준수하는 진리들이 그가 떠난 오랜 뒤에도 미국의 양심을 계속해서 지도해 나갈 것이라 기대했다. 그는 결코 완벽한 인간은 아니었다. 제도는 발전하고 환경은 변하지만 그러나 그는 최종적으로 인민을 믿었다.

1859년 에이브러햄 링컨은 "제퍼슨의 원칙들은 자유로운 사회의 정의이며 공리이다. 타인에게 자유를 부인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제퍼슨을 미국의 위험한 시간에 자유의 명분에 연계시켰다. 제퍼슨은 분명히 우리 시대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18세기와 19세기 초의 역사적 현실에 의해서 형성된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를 그런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관심사들 중 많은 것들이 보편적이다. 그의 삶은 항구적으로 중요한 특수한 삶이었다. 그가 어쩔 수 없이 모순된 영혼의 지도자였다면 그것은 그가 바로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건국된 1948년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토마스 제퍼슨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고 우리는 믿는다. 우리는 해외에서 그것을 위협하는 자들에 대항해서 우리의 자유를 보호하고 우리는 국내에서 그것을 위협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좌파의 독재체제에 우리의 민주적 방식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특권의 전제주의에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제퍼슨에 대한 트루먼의 이 헌사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토마스 제퍼슨은 자신의 사후 그의 묘비에 새기도록 명령한 3개의 업적은 첫째, 미국 독립선언서의 저자, 둘째, 종교적 자유를 위한 버지니아 법령의 입법자, 그리고 셋째로, 버지니아 대학교의 설립자였다. 그의 이 유언은 정신과 마음의 자유에 대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사랑과 미래에 대한 그의 굳은 신념을 집약해 준다.

조지 워싱턴이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초대 대통령이었고, 제2대 존 애담스(John Adams)가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대통령이었다면, 제3대 토마스 제퍼슨은 보다 활기 있고 명랑한 대통령이었다. 또한 그의 정치적 리더십은 모순으로 가득했다. 바로 이런 모든 이유에서 그는 인간적, 아니, 어쩌면 너무도 인간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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