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재] 농경은 사회적 협업, 마을 공동체가 그 출발점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koreanwave.asiatoday.co.kr/kn/view.php?key=20240901010000283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09. 01. 17:27

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8회>
송재윤1
송재윤(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외계인 미도가 내게 물었다.

"오늘날 지구 전역에는 모두 200여 개가 넘는 나라들이 있지요. 그 나라들은 인구나 땅 넓이나 실로 제각각이죠. 러시아, 중국, 미국, 인도처럼 거대한 대륙 크기의 국가들도 있지만, 바티칸 시국, 모나코, 나우루, 투발루, 리히텐슈타인, 싱가포르처럼 자그마한 나라들도 수십 개가 넘죠. 오늘날 지구 위엔 어떻게 그토록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나라들이 존재해야 할까요?"

지구인들에겐 너무나 익숙하여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왜 어떤 나라는 러시아처럼 땅이 넓고, 왜 어떤 나라는 싱가포르처럼 작은 도시국가로 존재하는가? 왜 어떤 나라는 중국이나 인도처럼 인구가 많고, 왜 어떤 나라는 캐나다처럼 큰 땅덩이에 고작 수천만 명만 살고 있는가?

◇ 국적과 민족의식의 발생, 과연 언제부터였을까?
현대의 지구인들은 거의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국적(國籍, nationality)을 갖고 살아간다. 물론 아마존의 열대우림에서 완전히 고립된 상태로 살아가는 미접촉 부족들(uncontacted tribes)도 아직 존재한다. 중국의 검은 아이들처럼 사각지대에서 무국적자로 살아가는 불행한 사람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80억 인구의 99% 이상은 국적자들이다. 그들에게 국적은 자아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다. 영어에서 "Where are you from?"(그대는 어디서 왔는가?)이라는 물음은 의미심장한 존재론적 질문이 아니라 원래의 국적을 묻는 관용적 표현일 뿐이다. 그만큼 현대의 지구인들은 국적 의식을 갖고 살아간다.

지구인들은 과연 언제부터 그렇게 국적 의식을 갖게 되었을까? 그 역사가 절대 길다고 볼 수는 없다. 일부 국수주의자들은 '우리나라'가 마치 단군 이래 건국(建國)되어 거의 반만년 존재해 왔다고 주장하지만, 조선 유생들은 구한말까지도 문명을 전수한 은(殷)나라의 현인 기자(箕子)를 오매불망 정신적 조상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 점에서 지구인의 국적 의식은 근대적 민족국가(nation-state)가 형성되면서 국가 주도의 대중 교육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이후에 생겨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아무리 길어야 그 역사가 200년 안쪽이라는 얘기다.

◇ 농사지으며 눌러살기 시작한 지구인들

지구인의 문명사 최종 단계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국가의 발생'과 '민족국가의 형성'이라는 주제를 지금 살짝 미리 짚어보는 이유는 국가 형성의 최초 단계는 바로 농경의 발생이기 때문이다.

방글라데시 농부
방글라데시 농부. 2010년 사진 Balaram Mahalder. 공공부문
농경이 발생한 후 지구인들의 삶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땅을 갈아 씨앗을 뿌려 곡물을 수확하는 식량 생산(food production)의 단계로 돌입하면서 지구인들은 수십만 년 이어가던 수렵·채집의 유랑 생활을 버리고 한 곳을 정처 삼아 눌러살기 시작했다. 문화인류학에서 말하는 '눌러살기(sedentism, 定住)'란 한 장소에서 장시간 이동하지 않고 살아가는 유형의 삶을 말한다. 현대 지구인들에겐 너무나 익숙해진 삶의 방식이지만, 결코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은 아니다. 지구인의 긴 역사에선 불과 1만여 년 전에 발생한 최근의 현상일 뿐이다.

농사를 짓기 전 지구인들은 기껏 20~30명, 많아야 100명 이하의 '작은 무리(small band)'의 성원으로 살아갔다. 그 작은 무리는 당연히 친족들로 구성되었고, 생활의 주업은 수렵과 채집이었다. 농경은 그러한 지구인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지구인들은 유랑을 멈추고 한 곳에 눌러살며 땅꾼의 삶을 살거나 계절에 따라 특정 지역을 배경으로 소·양·말 등의 가축을 몰고 다니는 목동의 삶을 살게 되었다. 땅을 갈고 가축을 치면서 지구인들은 한 곳에 눌러살며 더 큰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농경이 시작한 후 사람들은 왜 한 곳에 눌러살 수밖에 없었을까?

◇ 땅을 갈며 눌러살게 된 지구인들

농경이란 인위적으로 자연환경을 개조하여 대량의 식량을 확보하는 경제적 생산방식을 말한다. 농경으로 식량이 증산되면서 인구가 급격하게 불어났다. 급증한 인구를 먹여 살리려면 그만큼 식량 증산이 더 필요해졌다. 식량 증산을 위해선 단위 면적에서 최대한의 곡물을 산출해야만 했다. 생산의 최대화를 위해선 수로 공사와 개간 사업이 필수적이었다.

둑을 쌓아 물길을 바꾸고 숲을 열고 땅을 갈기 위해선 수십, 수백 명의 손발이 필요했다. 대중의 노동력을 조직적으로 투입하는 사회적 협업이 없이는 농업적 생산력 증대란 불가능했다. 예나 지금이나 공익사업은 노동력의 조직적 동원과 투입을 요구했다. 힘센 장정들이 일개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려면 당연히 여왕개미처럼 지혜로운 지도자가 나와야 했다. 그래야만 강둑을 쌓고 농지를 넓히는 중대한 공익사업이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농경이란 수렵채집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사회적 협업을 요구했고, 협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정치적 영도력이 절실해졌다.

◇ 눌러살며 마을을 이루게 된 지구인들

농경과 더불어 지구인들은 마을(village)에서 살게 되었다. 지구인의 긴 역사에서 마을의 출현, 확산, 소멸의 과정은 길어야 기껏 1만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지구인들에게 집(home)이라 부르는 '영구 정처(定處, permanent settlement)'가 생겨난 시점은 농경 발생 이후였다. 마을이란 수십 가구가 듬성듬성 모인 뜸(hamlet)보다는 크고, 여러 마을이 결합된 읍(邑, town)에는 못 미치는 촌민들의 공동체를 이른다.

태고의 수렵채집 경제에서도 친족공동체를 형성되었지만, 농경의 발생은 그러한 경향을 더욱 강화되었다. 스무 명 정도의 혈연공동체가 작은 무리를 이루며 살아가다가 대규모의 공동 사업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친족끼리 마을을 이루고 사는 집성촌(集姓村, single-surname village)이 생겨났다. 집성촌은 중국, 한국, 유럽, 아프리카의 역사에서 흔히 나타났다. 집성촌에 대해선 앞으로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우선 그 생명력에 관해 한마디만 하자면….


중국 푸젠성 하카 마을의 토루
중국 푸젠(福建)성의 하카(客家) 마을의 토루(土樓, 흙집)
2002년과 2004년 나는 미국 하버드 대학교 중국 지방사(地方史, local history) 연구팀에 들어가서 중국 저장(浙江)성 진화(金華) 지역에서 두 여름을 보내며 중국의 농촌 마을을 탐사했다. 놀랍게도 중국 농촌엔 그때까지도 이재(李齋), 노재(魯齋), 제갈촌(諸葛村) 등등 같은 성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 다수 존재했다. 1950~1960년대 전통적 촌락은 대략 2만명 단위의 인민공사라는 코뮌 시스템으로 재편됐음에도 전통적 집성촌은 사라지지 않았다. 개혁·개방 이후 1980년대 중국 농촌의 향진기업
(鄕鎭企業) 중에는 집성촌에서 생겨난 사례가 적잖았다.

경상북도 안동의 하회(河回)마을이나 경주의 양동(良洞)마을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보통 17~18세기에 전성기를 이룬 한국의 집성촌에는 보통 수백 명이 모여 살았고, 아무리 많아야 2000명을 넘지 않았다. 1961년 조사에 따르면 하회마을에는 249가구, 1328명이 살고 있었다. 오늘날 양동마을에는 130여 가구, 240명 정도만 살고 있지만, 16~17세기엔 그 규모가 2~3배 정도 더 커서 1000 명 정도에 달했다고 한다. 하회마을이나 양동마을에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두 가지 경제적 공통점이 있다. 바로 마을이 넓은 농토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과 사람들 대다수가 농군이었다는 점이다. <계속>


송재윤(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