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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25세란 젊은 나이에 선왕 조지 6세에 이어 즉위한 엘리자베스 2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격동의 시기에 강건한 모습으로 통합과 안정을 이끌어온 여왕으로 평가된다. 재위 70년 동안 그를 거쳐간 총리만 해도 지난 6일 공식 임명된 리즈 트러스 신임 총리까지 총 15명이나 된다.
하지만 여왕은 총리를 임명하는 것 외에 현실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국가통합의 상징으로서 특히 나라가 어려울 때 국민의 단결을 끌어내는 데 기여하는 역할에만 충실해 오히려 영국 국민들의 존경과 함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런 점 때문에 올해 6월 성대하게 치러진 즉위 70주년 기념 플래티넘 주빌리에서는 군주제에 반대하는 이들조차도 여왕에게 축하를 보냈다.
과거 군주들과 달리 제한된 역할에 머물면서도 여왕은 2차대전 이후 45년여간 이어진 냉전과 공산권 붕괴, 유럽연합(EU)의 출범과 영국의 탈퇴 등 격동기 영국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고 대영제국 해체 이후 영연방을 묶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덕분에 여왕은 영국의 상징이자 최대 소프트파워로 자리매김했고, 이후 영국 왕실이 구시대 계급사회 상징이라는 지적으로부터도 슬쩍 비껴갈 수 있었다.
다만 찰스 왕세자 등 후손들을 둘러싼 각종 스캔들은 늘그막에 들어선 여왕의 주름살을 더욱 깊게 만드는 골치거리가 됐다. 특히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의 이혼은 세계가 주목한 이슈였다. 이후 다이애나비가 사고로 사망했을 때 여왕은 입장을 늦게 냈다가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최근엔 해리 왕자가 왕실 밖으로 뛰어나가서는 가족들과 불화를 겪고 있고 아끼던 차남 앤드루 왕자는 미성년자 성폭력 혐의로 '전하'라는 호칭까지 박탈당했다.
여왕은 한국과도 인연을 맺은 바 있다. 여왕은 한국과 영국의 수교 50주년이었던 지난 1999년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안동 하회마을에서 여왕의 일흔 세 번째 생일잔치를 한국전통방식으로 마련해 세계인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