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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각범 칼럼] 19세기 조선인가, 21세기 대한민국인가

[이각범 칼럼] 19세기 조선인가, 21세기 대한민국인가

기사승인 2023. 06. 20.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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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각범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
21세기 대한민국은 19세기 조선이 아니다. 국가의 존립을 등한히 한 채 친청파, 친일파, 친러파로 나눠 싸우던 시기가 아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지정학적 리스크에 시달리던 동아시아의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글로벌 중추 국가로서 세계적 문제에 정면으로 대처하고 있다. 이 시점에 주한중국대사는 개인적 리스크로 탈출구를 찾던 이 나라 국회  제1당 당수를 들러리로 세우고 21세기 외교의전에서 한참 벗어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일각에서 미국이 승리할 것이고 중국이 패배할 것이라는 베팅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잘못된 판단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흐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아니면 150년 전 생각의 관성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이 지체된 상황인식은 우리나라의 진영정치가 자초한 측면이 있다. 한때 진보를 자처하는 일부 학자와 언론인들이 미중 2강 시대를 일컬어 17세기 초반의 명청(明淸) 교체기와 같다고 한 적이 있었다. 명나라처럼 쇠퇴하는 미국과 청나라처럼 새롭게 떠오르는 중국 사이에서 한국이 줄을 바꿔서 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속국으로 종주국에 운명을 맡겨야 했던 구시대 조선이 아니다. 중국이야말로 국가주석이 미국 대통령을 만나서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했다는 나라이다.

대한민국의 국가전략은 대한민국 국민과 정부가 선택한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기준연도인 1960년도에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68불로 세계 최하위권이었다. 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이 자주 언급하듯이 당시 한국은 현재 다수의 최빈국들보다 잘 못살았다. 그러한 나라를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으로 만든 경제발전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문화혁명으로 무너진 중국경제를 일으켜 세우면서 덩샤오핑 위원장이 가장 많이 참고한 모델이 박정희 모델이었다고 전해진다. 또 철강산업을 일으킬 때는 박태준 모델, 도시건설에는 싱가포르의 리콴야우 모델을 각각 차용하였다고도 한다.

중국도 탈냉전 시대를 맞아 개방노선을 채택했다. 덕분에 WTO체제에 무임승차하고, 애국주의, 당정일체, 정경일치로 비약적 경제성장을 이어갔다. 작년 기준 미국이 세계GDP의 21%를 생산하는 동안 중국은 약 15%를 생산하는 정도로 턱밑까지 추격하였다. 그다음으로 일본이 약 5%. 중국과 큰 격차를 보이는 3위이다. 세계에서 G2라고 부를 만했다. 바로 이 시점에 중국의 '패권도전'과 미국의 응전이 시작되었다. 화웨이의 5G 네트워크를 필두로 첨단기술산업과 방위산업의 기술유출 문제로 미국의 제재가 시작되었다. 한국도 반도체, 디스플레이, 2차전지, 원자력발전 등 세계 시장에서 비교우위를 갖고 있던 분야에서 이미 중국에 추월당했거나 거세게 추격당하는 중이다.

시대가 바뀌면 국가전략도 바뀐다. 우리나라도 전 정권 시절에 '경제는 중국, 안보는 미국'이라는 전략적 모호성을 내세워 등거리외교를 추진하였다. 지금 우리 편한 대로 주요 강대국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중국의 도전에 미국이 위험회피(de-risking) 전략으로 응전하는 '공급망 재편 시대'가 왔다.

현재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새로운 질서로 재편에는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 하나는 경제 안보이고, 다른 하나는 동맹의 강화이다. 

경제 안보의 등장 배경에는 첨단기술 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글로벌 팬데믹 등 얼핏 보면 우발적일 수 있는 사건이 있었다. 세계 여러 나라들은 에너지와 식량 가격의 폭등으로 인한 물가 상승 압박과 더불어 글로벌 팬데믹으로 인한 경기침체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우연적이고 일시적인 압박보다도 산업 안보, 무역 안보, 첨단기술 안보, 에너지·식량 안보를 위협하는 지속적인 외부 충격이 경제 안보 등장의 더 큰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공정한 게임의 법칙과 상호주권 존중이라는 세계질서의 대원칙에 대한 구조적 도전이 문제 된 것이다.

이 시대에 대한민국의 상황은 대단히 엄중하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성취를 이룩한 나라임과 동시에 긴박한 안보 환경을 갖고 있는 나라이다. 안타깝게도 분단된 국가이고, 북핵과 대치하는 세계의 최전선국가이기도 하다. 세계의 전쟁사가 보여주듯, 평화는 상대방의 선심에 기대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문재인 정권의 '거짓말 평화'는 북한에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의 시간을 벌어주었다. 대신 우리에게는 초단위의 대응시간만 남겨놓았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이 미국 승리에 베팅한다고? 우리에게는 지금 북핵의 위협 아래에서 한 쪽에 베팅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이 엄중한 상황 속에서 대한민국의 새 정부가 동맹에 소홀했던 전임정부의 과오를 씻고 동맹과 더불어 세계적, 구조적 위험에 공동대처하는 것은 우리의 주권적 사항이다.

'나 홀로 군사력'에만 의존하는 것을 자주국방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는 나라는 이 지구상에 없다. 자유, 개방, 공정, 인권존중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들과 두터운 동맹을 맺고, 실시간 정보를 교환할 수 있어야 실질적인 안보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지난달 한미정상회담에서 합의한 경제 안보 전략적 파트너십 강화의 구체적 내용을 보면 한미동맹이 나아갈 방향을 읽을 수 있다. 공급망 협력, 첨단 핵심기술 협의강화, 사이버·우주 분야로의 협력 확대 위에 한미청년특별교류 이니셔티브가 특히 눈에 띄었다. 인도 태평양 전략을 공유하면서 첨단으로, 우주로, 미래로 확대하는 동맹의 방향이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1980년대 운동권이 부르짖던 주변부자본주의 변방 국가가 아니다. 동학혁명시대 죽창가를 불러야 할 때는 더더욱 아니다. 지체된 역사인식에서 벗어나 21세기 오늘 우리에게 닥친 복합위기 극복을 위해 지혜를 모을 때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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