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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다시 찾고 싶은 너의 의미

[칼럼] 다시 찾고 싶은 너의 의미

기사승인 2023. 06. 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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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헌 종로구청장
정문헌 종로구청장
이름이나 지명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할 때 흔히 인용되는 것이 바로 김춘수 시인의 '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 시 구절은 이름이 갖는 상징성을 함축해 보여준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다른 존재와 구별 짓기 위한 것이자 존재를 인식하기 위한 행위인 것이다. 명명(命名)된 후에야 비로소 하나의 존재로 정립되는, 그 본질에 대한 철학이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우리는 언어를 매개로 어떤 대상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고 관계를 맺는다. 언어에는 우리의 문화와 정체성이 담겨 있고 소통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언어를 조합해 이름 붙여진 모든 것에는 각각의 고유한 의미가 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내뱉는 모든 것은 그 존재와 본질을 알맹이처럼 둘러싸고 있는 이름인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지명 또한 그렇다.

지명은 보통 지형·위치 등 자연적인 특성과 관련해 지어지거나 역사를 내포하기도 한다. 때로는 교통, 산업 등 인문환경에서 유래된다. 지금은 청주시로 편입된 청원군 내수읍 소재의 비상리(飛上里),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의 옛 지역인 비하리(飛下里)는 여러 기록이 있지만, 지역 주변에 산재한 벼랑을 뜻하는 '비알'에서 생겨났다는 시각이 유력하다. 날아오르고 내린다는 뜻이 담겨 있는 이곳에는 결국 비행장이 들어섰다.

종로구 역시 다양한 유래를 지닌 지명들이 무수하다. 특히 역사적인 의미가 담긴 지명이 많다.

종로구 '피맛골'은 말(馬)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임금님 행차에 지나던 백성들이 고관대작 행렬을 피해 숨어 다니기 시작한 것에서 '피마'가 유래됐다. 공평동은 의금부에서 재판을 공평하게 처리한다는 데에서, 내수동은 조선시대 내수사(內需司)라는 관청이 자리한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하지만 원남동과 원서동은 다르다. 이 지명들은 대일항쟁기, 일본이 격하한 창경궁과 창덕궁에서 유래됐다. 일제는 창경궁과 창덕궁을 '원(苑)'으로 격을 낮춰 '창경원'과 '비원'으로 부르며 한낱 동·식물원, 놀이기구가 가득한 유원지로 전락시켰다. 일제는 이렇게 궁궐의 위상을 떨어뜨려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고 뿌리를 뒤흔들었다.

물론 지금까지 원남동과 원서동에 제대로 된 이름을 찾아주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기회비용을 이유로 변화를 주저하는 입장과 바로 잡힌 토대 위에서 새로운 미래를 그려나가자는 입장이 서로 팽팽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많은 주민들은 이제 왜곡된 지명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단순히 지명 하나만 바꾸는 것이 아니다. 지명은 그 지역 주민들의 자부심을 담고 있다. 당연하게 쓰고 부르는 것에서 이제는 잃어버린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찾아가야 한다.

물론 동명 개정에는 행정적 비용이 불가피할 것이다. 하지만 원남동·원서동은 앞으로 문화관광벨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곳들이다. 종로의 문화뉴딜은 종묘, 창덕궁, 경복궁 등 아름다운 우리 문화유산들이 대학로 공연예술거리 등과 시너지를 발휘하면서 종로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 또는 미술관, 공연장이 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잠재력이 제대로 발현되면 이곳에서 벌어지는 행정적·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활동들은 지금보다 수 백, 수 천 배 늘어나게 된다. 그 때 되어서 더 큰 경쟁력을 위해 동명을 바꾸려 들면 지금보다 훨씬 큰 비용을 지불해야만 할 것이다.

지난해 일제가 갈라놓은 창경궁과 종묘의 연결통로가 90년 만에 복원되면서 돈화문로에서 익선동 한옥마을까지 궁궐담장길을 즐길 수 있게 됐다. 바로잡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앞으로 우리가 누릴 가치는 예측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이제 원남동과 원서동의 이름을 바로 잡을 때다. 올바른 명명이야 말로 '우리 식 고도현대화'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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