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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고르디아스의 매듭

[칼럼]고르디아스의 매듭

기사승인 2023. 06. 27.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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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
매듭은 풀어야 한다. 그런데 매듭을 풀지 않고 단칼에 베어버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한 이가 있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알렉산드로스의 일화다. 농부 고르디아스는 우연히 소가 끄는 이륜차를 타고 왔다가 신탁에 의해 프리기아의 왕이 된다. 믿기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을 기뻐하고 기리기 위해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준 소달구지를 신전에 받친다. 그리고 아주 복잡한 매듭으로 달구지를 신전에 묶어두고선, 이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의 왕이 될 것이라고 천명한다. 이 문제를 거침없는 완력으로 해결한 이가 바로 알렉산드로스다.

난제를 풀어내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을 의미하는 고르디아스의 매듭에 관한 고대의 이야기는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에게도 투영된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자리에서 자신을 폄훼하는 무리에게 그는 달걀을 세워볼 것을 제안한다.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하자, 콜럼버스는 달걀의 밑을 조금 깨어 평편하게 만든 다음 가뿐하게 그것을 세운다. 쉬운 해결책이지만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일을 해낸 이들에게 반영된 신화다. 역사적인 전후 관계를 살펴보면 콜럼버스의 일화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코의 이야기가 와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두 이야기에서 우리가 놓칠 수 있는 점은 바로 결과론적이라는 사실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 군주로서 제국을 건설한 영웅이며, 콜럼버스 역시 황금을 좇아 인도를 찾아 나섰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역사적 인물이다. 그런 알렉산드로스에게 고르디아스의 신화가 투영됐고, 브루넬레스코의 일화가 콜럼버스의 미담으로 변형돼 고정된 이미지로 구축됐다고 봄이 바람직하다. 어떤 역사적인 위인에 대한 인물평에 호사가들이 동시대의 소소한 에피소드를 슬쩍 얹히면 이를 미디어가 확대 재생산하여 배포한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한편 흥미롭게도 고르디아스의 아들이 바로 미다스이다. 우리에게 '황금의 손'으로 잘 알려진 미다스의 이야기는 사실 비극적이다. 디오게네스에게 선물로 부여받은 능력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으로 돌아온다. 먹을 음식도, 마실 포도주도 모두 금덩이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는 죄를 씻어내는 의식을 치르고서야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미다스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미다스는 크게 깨우치고 나서 자연에 귀의한 삶을 살아가지만, 그런 그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친다. 신들의 음악 경연에서 미다스는 한쪽 편의 손을 들어주었다가 아폴론에게 저주를 받아 당나귀 귀가 되고 만다. 이를 감추고 싶었던 미다스였지만 비밀을 알아버린 그의 이발사는 구덩이를 파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친다. 그러나 구덩이 위에 솟아난 갈대는 바람이 불 때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사방팔방에 속삭이게 된다. 권력의 선택과 그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낸 우화라 할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도 역설적이긴 마찬가지다.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고 나서 인도의 인더스강까지 진출하여 고르디아스의 예언대로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하는 듯했지만, 그의 성미 급함 때문일까, 당시 유행하던 열병으로 전쟁 중에 급사한다. 마케도니아 왕국 역시 그가 죽은 이후 내분으로 치닫게 되고 제국의 꿈은 사그라들고 만다.

알렉산드로스가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른 것과 콜럼버스 달걀의 이야기는 곧잘 리더의 결단력으로 포장돼 소비되는 경향이 있다. 구국의 결단으로 욕을 먹더라도 그 일을 자기가 해내고야 말겠다는 권력자의 과잉된 자의식은 자칫 '이 산이 아닌가 봐'란 식의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 산이 아니면 저 산을 가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잘못된 고지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너무나도 많은 희생과 파괴적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교육정책과 같은 중차대한 일에 '고르디아스와 같은 결단'이 필요하다는 말은 평론가를 자처하는 호사가들의 훈수와 같은 무책임한 언어다. 미래세대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정책 결정은 묻고 따져야 할 것이 산재한 엄청난 난제를 푸는 일이다. 성미 급함으로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던 알렉산드로스는 후대 서구의 제국주의가 극성하던 시대에 잠시 영웅으로 소환될 수는 있었겠지만,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그의 왕국은 영속하지 못하고 소멸했다는 점이다. 공정과 자유 그리고 경제적 성과와 가치 외교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손대는 일마다 미다스의 손을 자처하지만, 자칫 마이너스 손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 아닌가.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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