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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불가능한 연대의 역설

[칼럼]불가능한 연대의 역설

기사승인 2023. 08. 03.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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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
2020년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영화, '뉴 오더'(New Order)의 설정은 끔찍하다. 다년간 국제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을 선보였던, 멕시코 감독 미셸 프랑코가 연출한 이 영화의 문제의식은 분명해 보인다. 극단적인 양극화의 결과가 어떠한지, 가상의 가까운 미래를 소환해 섬세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숨 막히게 묘사하고 있다.

영화는 양극화의 부조리보다는 그 결과에 초점을 맞춘다.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극단의 사회, 멕시코시티 업타운에 위치한 고급 주택에서 결혼식 파티를 즐기는 최상류층과 도심을 중심으로 시위대와 군경이 충돌하는 유혈사태의 현장이 교차한다.

이런 와중에 파티장을 찾아온 초로의 남자, 그는 과거 이 집에 동거하며 아이들을 키웠던 유모의 남편이다. 사연인즉슨 심장판막 수술을 받지 못하면 자신의 아내가 죽을 처지에 놓이게 돼 옛 주인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다.

노인이 문전박대당하는 상황에서, 파티의 주인공인 신부 마리안은 자신의 유모에 관한 딱한 소식을 듣게 된다. 금고에 현금을 두고도 전할 수 없게 되자 마리안은 직접 카드로 유모의 병원비를 대납해 주려고 거리로 나선다. 하지만 길거리는 이미 극단으로 내몰린 도시빈민들의 폭력시위로 인해 무법이 되어버린 상황, 설상가상으로 마리안의 집은 약탈자들에게 습격당해, 어머니는 현장에서 살해되고 거물급 자산가인 아버지는 총상을 입어 중태에 빠진다. 그녀는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가 사태를 진압하러 투입된 군인들에 의해 인도된다.

하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그 사이 폭력시위를 빌미로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나고, 혼란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일부 군인 무리가 마리안을 인질로 삼고 돈을 요구하게 된다. 그녀 이외에도 유산계급으로 보이는 이들은 이마에 번호가 적혀져 분류되고 불법 감금돼 군인들의 돈벌이 대상이 된다. 온갖 고문과 성폭력으로 만신창이가 된 인질들은 어떤 법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유기된 채 방치된다.

사태는 더 복잡하게 진행돼, 주인집 딸인 마리안을 돕고자 나섰던 하인 모자(母子)는 도리어 인질극의 주범으로 몰려 군인들에게 연행되고, 군부는 자신들의 과오를 덮으려고 마리안과 다른 인질들 모두를 살해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산소호흡기를 단 채 마리안의 아버지는 새로운 군부의 최고 권력자가 입회한 사형집행장에 나란히 앉아있다. 인질이 된 마리안을 돕고자 했고, 약탈이 발생한 상황에서도 주인을 배신하지 않고 충실했던 하녀의 머리엔 두건이 씌워지고 목엔 밧줄이 감긴다.

영화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선량했다. 유모에게 조금이나마 금전적인 도움을 주고자 했고, 집안일을 돕던 이들에게 그나마 연민이 있었던 어머니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경호원에게 죽임을 당한다. 어린 시절 자신을 돌봐준 유모를 진심으로 돕고자했던, 무모하리만치 용감한 주인공 마리안은, 자신을 구하러 온 줄 알았던 군인들에게 도리어 비참하게 유린당하고, 급기야 사건의 은폐를 위해 군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살해된다. 한편 폭력시위대가 습격한 상황에서 경호원을 비롯한 모든 집안의 하인들은 주인을 배신하고 약탈에 동참했지만, 끝까지 주인을 배신하지 않았던 하인 모자는 오히려 누명을 쓰고 즉결 처분되거나 교수형을 당한다. 그렇게 영화는 은근하게 '연대의 불가능성'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영화가 고발하는 지점은 따로 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한 양극화의 극단의 끝이 무엇인지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인 방식으로 연대의 필요성을 피력한다. 여기에서 연대의 주체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혹은 기업과 노동자, 또는 사회네트워크 자체로서 복잡한 양태로 호환되는 모든 사용자와 공급자다. 분열과 양극화의 정치엔 소위 을에 해당하는 계급·계층만 몰락하는 것이 아니라 갑의 위치에 있는 가치들도 몰락할 수 있다는 경고다.

분열의 틈새에 똬리를 튼 권력의 하수인이 돼 산소호흡기로 연명한 채 기득권을 유지하기보다는, 불가능해 보이는 자본과 노동의 연대로 소비 주체를 키움으로써 경제를 활성화하고 현재의 삶과 미래를 기약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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