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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각범 칼럼] 대한민국 세계전략 전개와 국내 선동정치 극복의 숙제

[이각범 칼럼] 대한민국 세계전략 전개와 국내 선동정치 극복의 숙제

기사승인 2023. 08. 20.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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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각범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
지금 세계는 세기적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다.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디지털 전환, 에너지 전환, 생의학적 발전에 가속도가 붙었다. 동시에 인간의 탐욕으로 시작된 지구 환경파괴는 이미 인류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이제 "지구가 더워지는 (global warming) 시기는 끝나고 지구가 끓어오르는 (global boiling) 시기가 되었다"고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말하였다. 세계 인구 지형도 변화하고 있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우리나라가 머지않은 미래인 200년 후에도 존속 가능할지 걱정되는 가운데 인구가 감소하는 OECD 국가 대부분과 인구가 넘쳐나는 아프리카, 남아시아 나라들의 입장이 교차하고 있다.

세계의 문제는 바로 우리나라의 문제고, 우리나라의 문제는 곧 세계의 문제다. 우리나라는 운명적으로 전쟁과 평화의 문제와 문명사적 과제에 대처하는 세계의 최전선에 서게 됐다. 이 격변 속에 우리나라는 변혁의 주체가 될 것인지, 아니면 변화의 피동체로 회귀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이제 우리나라는 책임 있는 세계중심국가의 일원으로서 인류 공통의 문제해결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한다. 새로운 질서형성에 긍정적으로 기여해야 숨통이 트이고, 새로운 활동공간이 생긴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면, 세계가 단합해서 지구적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환상에 가깝다. 냉전과 탈냉전의 과정을 거쳐, 세계는 경쟁하는 세력 간의 긴장관계로 긴박하게 접어들고 있다. 우리는 어느 편과 연대하여 세계적 문제에 대처할 것인가. 미중 갈등의 원인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가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지 명확하게 드러난다. 미중 갈등은 중국이 사실상의 국영기업을 앞세워 다자주의적 경제질서를 해치고 있다는 의혹에서 촉발됐다. 특히 중국의 첨단산업 발전과 기술취득 과정에서 안보문제가 불거짐으로써 미국의 제재대상이 됐다. 8월 2일자 〈파이낸셜타임스〉지는 미국과 중국에 대해 한국이 취해온 그간의 이중적 접근은 미중 간 첨단전쟁으로 인해 끝났다고 보도했다. 경제안보시대의 공급망 재편은 그렇게 시작됐다.

우리나라는 세계적 변화에 조응하여 혁신하고 전진해야 한다. 우리와 함께 세계적 네트워크를 형성할 나라들은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갈 세력이어야 하고 자유, 법치, 인권존중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나라들이어야 한다. 우리만의 특수한 입장에 매달리는 순간 우리의 선택지는 좁아진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 왔다. 이 엄중한 시기에 우리나라 정치가 전진하려는 나라의 발목을 잡고 있다.

정치의 중심은 국회다. 그런데 87년 헌법으로 막강해진 의회의 권능이 남용되고 있다. 국정을 논의하는 자리마저 선전선동의 장이 돼버렸다. 고무신 신고 버스 타며 출퇴근하던 1950년대의 국회의원들과 민주화의 선봉에 섰던 1960년대 국회의원들의 우국충정과 기개는 간 곳이 없다. 늘어나는 특권에 반비례하여 책임은 줄어들고 있다. 사명감은 찾기 힘들다. 

정책대안 대신 정치공학적 계산이 국회를 움직인다. 국민통합을 위해 노력해야할 정치인들이 국민을 분열시켜 세대별·지역별·계층별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이는 무모해 보이지만, 철저한 표 계산에 의한 것이다. "미래가 짧은 사람들은 투표하지 말라"는 발언 또한 그렇다. 기본적인 인간성과 관용이 결여된 이러한 발언조차도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회자되고 밈(meme)으로 확대재생산 된다. 독일 속담에 "젊어서 급진적이지 않으면 가슴이 없고, 나이 들어서도 급진적이면 머리가 없다"는 말이 있다. "젊었을 때의 진보사상을 40세가 넘어서도 계속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면 거짓말쟁이"라는 프랑스의 지성 레이몽 아롱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 다른 시대의 상황을 경험한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고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다양성과 갈등을 비폭력적이고 문명적으로 표출하고 조정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세계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기이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국회 제1당이 장외투쟁에 몰두하고, 정치과잉 속에서 정치가 실종되는 이상한 나라다. 

우리 국민은 현명한 일반의지를 가지고 있다. 건국 이후 역대 대통령선거 결과가 그것을 증명한다. 온갖 선전선동과 여론조작의 위협 속에서도 우리나라는 면면히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정보의 홍수 속에서 왜곡된 정보는 비효율과 혼란을 야기하고, 그렇게 만들어지는 여론은 성숙한 논의를 해치고, 국민의 판단을 흐린다.

이제 우리나라 '국회무책임제'를 극복하기 위한 작은 혁신이 필요하다. 

먼저 감정적 자극에 치우치지 않고 사실과 합리에 기반한 숙의(熟議)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 한다. 문재인 정부에서 잠시 시도하였던 공론화위원회를 진지하게 다시 추진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부는 명분 없는 탈원전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전문가들을 논의에서 배제한 채 민주적 방식으로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5·6호기의 건설중단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설치된 공론화위원회는 시민참여단을 구성하여 찬반 양측의 의견을 집중적으로 청취한 뒤 약 1개월 정도의 숙의과정을 거쳐 건설재개라는 결론을 내렸다. 예상치 못한 결론에 당황한 문재인 정부는 그 이후 다시는 공론화위원회를 가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론화위원회는 논의과정을 통해 숙의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공론화위원회의 제도적 정착을 위해 법제화를 서둘러야 할 것이나 그 이전에라도 국무총리 훈령에 기초해서 현안의 논쟁적 이슈에 대해 결론을 내려야 한다. 하나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처리수 관련 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서울-양평고속도로 노선 설정에 관한 건이다. 

선동정치를 숙의정치로 바꾸기 위해 국회의 논의방식도 바꾸어야 한다. 대정부질문 때 현행의 1문 1답 방식에서 벗어나 사실에 입각하여 충분한 내용을 갖춘 질문을 하고 충실한 자료로 답변해야 한다. 현대의 복잡사회에서 대부분의 사안은 "예, 아니오"로만 답변할 수 있는 범주를 훨씬 벗어난다. 캠퍼스 성토장의 호통치고, 말 끊는 행태의 질의방식에서 벗어나 국회본연의 토론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국회의원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화려한 직업 같지만, 실상 지역구민의 포로이자 당내정치에 종속되어야 하는 처지이기도 하다.

현행 소선거구제에서 국회의원은 국가적 과제보다는 지역구와 당내계파에 더욱 속박되게 된다. 국회의원들이 지역정치와 당내정치의 굴레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현행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전환할 필요성이 있다. 무당층의 비율이 늘어나는 현실도 수용해야 한다. 남은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여야 정치인들이 선거법 협상에 진지하게 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급변하는 세계 환경 속에서, 한 국가로서 능동적이고 유연하게 대응하려면, 민주적 절차의 기본적인 부분들을 정비하는 것이 시급하다. 우리에게는 지금, 개개인의 유능과 의지를 넘어서는 제도적인 혁신이 필요하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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