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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연의 오페라산책]파격적 시도의 레지테아터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손수연의 오페라산책]파격적 시도의 레지테아터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기사승인 2023. 09. 28.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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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오페라단의 '라 트라비아타' 중 한 장면./국립오페라단
현대 오페라는 연출자의 주관이 많이 개입되는 레지테아터(Regie-Theater: 연출가가 원작의 시대와 배경 등의 설정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연출가 해석 중심의 무대) 연출이 보편적이다. 정통 오페라에서는 음악과 대본에는 손대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기 때문에 레지테아터 연출은 창작한 후 몇 백 년이 지나도 변하기 어려운 오페라의 외형에 다른 옷을 입혀줄 수 있다. 연출가 중심의 오페라는 고전적인 음악과 멋진 조화를 이루는 혁신적 작품이 등장하기도 하고, 연출의 개입이 지나친 나머지 오페라로서 작품의 본질이 위협받는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 국립오페라단도 외국 초빙 연출가들의 레지테아터 경향이 짙은 작품들을 많이 공연하고 있다. 프랑스 연출가 뱅상 부사르에게 이번 '라 트라비아타'는 세 번째 국립오페라단 연출작이다. 그는 오페라 '마농 레스코'에서 매우 현대적 공간과 의상으로 세련된 무대를 완성했고, '호프만의 이야기'에서는 웅장한 계단을 전면 배치하며 벨 에포크 풍의 화려한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낭만적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그중에서 최근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오른 '라 트라비아타'는 그의 주관적인 해석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 공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연출가의 말에서 그는 베르디가 '당대의 위선과 잔인하리만큼 경박한 태도를 보여주려고' 이 오페라를 작곡했다고 말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뱅상 부사르는 비올레타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이 잔인하리만큼 경박한 태도를 취하도록 만들었다. 현대의 오페라 연습실로 바뀐 1막의 무대에서 비올레타의 친우 플로라를 비롯한 주변인들은 경박을 넘어 천박한 행태를 선보인다. 그리고 2막 1장, 알프레도는 피아노 위에 올라서 행복에 도취된 감정을 노래하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는 등 자기중심적이고 유아적 모습이 더욱 강조된 인물로 그려진다.

점잖게 등장한 조르쥬 제르몽 또한 비올레타를 딸 같은 존재가 아닌 이성(이 부분은 본디 고급 창부인 이 여성에 대한 일반적 태도로 납득이 가는 연출이었다)으로 여기는 듯 역겨운 몸짓으로 그녀에게 다가선다. 그리고 2막 2장의 눈부신 파티 장면은 연출가의 미장센을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장면으로, 연습실과 현실 세계, 오페라가 공연 중인 무대 등 기존의 관념과 공간을 넘나드는 미학을 보여줬다. 파격은 3막에서도 이어졌다. 병든 비올레타에게 뒤늦게 달려와야 할 알프레도와 제르몽은 이미 무대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그리고 비올레타가 파를란도(parlando·말하듯이)로 제르몽의 편지를 읽는 장면에서 실제 제르몽이 편지를 읽는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입체적 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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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오페라단의 '라 트라비아타' 중 한 장면./국립오페라단
강렬한 레지테아터 경향의 이번 공연이 참신한 고전의 재해석으로는 느껴졌다. 그러나 연출이 의도한 지나치게 많은 상징적 행위들을 이어가느라 어색한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 성악가들은 연출가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했지만 때때로 연기와 음악 사이에서 인지부조화를 겪는 듯한 인상도 받았다. 특히 비올레타의 과거와 해방을 상징하는 흰 드레스의 소녀는 등장할 때마다 주의를 산만하게 만든 사족으로 보인다. 특히 2막 1장 비올레타와 제르몽의 듀엣에서 등장해 주변을 맴도는 소녀 때문에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은 사라지고 집중력이 크게 흐트러졌다.

소프라노 박소영은 혼신을 던진 연기와 가창으로 태산과도 같은 비올레타 역할을 잘 표현했다. 그러나 리릭소프라노로서 비올레타를 노래하기에는 다소 밝고 가벼운 음색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격렬한 감정변화를 토해내는 1막과 2막보다 최소한의 볼륨을 가지고 정제된 음성으로 노래한 3막에서 더 빛나는 모습이었다. 테너 김효종은 서정적이고도 선명한 음색으로 공감하기 어려운 주인공 알프레도를 호소력 있게 그려냈다. 김효종의 안정된 가창 덕분에 불안하고 심한 감정 기복의 이번 알프레도가 그나마 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 본다.

이번 오페라의 등장인물 중에서 일반적인 모습과 가장 다르게 표현된 인물을 꼽자면 바리톤 정승기가 맡은 제르몽일 것이다. 정승기는 등장 초반 큰 볼륨과 오버액션으로 제르몽의 상징인 노회한 부르주아라기보다 무뢰한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아리아 '프로벤자의 하늘과 땅'은 풍부한 레가토로 유연하게 노래해 큰 갈채를 받았다. 이 작품에서 제르몽은 고상한 척하지만 바닥에 떨어진 돈을 줍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으로 졸부의 행태를 보여주는데 그는 기존과는 다른 제르몽을 잘 그려냈다.

이날 무대에서 주역들보다 더 시선을 강탈한 등장인물은 가스통을 맡은 테너 위정민이다. 위정민은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력으로도 유명한 성악가인데, 드랙퀸으로 분한 2막 2장에서 여느 뮤지컬 배우 못지않은 동작과 연기로 극단적으로 타락한 파티장을 재현하고자 했던 연출자의 의도를 잘 표현했다. 가창과 적극적인 연기력을 겸비한 위정민은 우리 오페라계에 귀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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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오페라단의 '라 트라비아타' 중 한 장면./국립오페라단
전반적으로 경박스럽고 가벼운 분위기를 나타내고자 한 작품을 위해 오케스트라도 상당히 속도감 있게 움직였다. 세바스티안 반 레싱이 지휘한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비교적 빠른 템포를 바탕으로 현악은 물론이고 관악 파트 또한 경박하리만치 가벼운 흐름으로 무대와 어울리는 음악을 들려줬다.

설정과 공간이 수시로 변화하는 이 작품에서 변함없이 무대를 지키는 것은 그랜드피아노다. 그랜드피아노는 여러 가지 용도로 활용되고 비올레타는 그 위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부사르의 국립오페라단 전작인 2019년 '호프만의 이야기' 중 안토니아의 죽음 장면과 유사하다) 이번 작품 속 인물들은 자주 피아노 위에 올라서며, 그 위에서 환호하거나 절규하고 죽어간다. 이를 레지테아터의 의미와 연결해 본다. 현대 오페라에서 음악은 이제, 드라마의 완전한 우위를 바탕으로 공연되어야 한다는 연출가의 함의가 아닐까 추측한다.

/손수연 오페라 평론가·단국대 교수


손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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