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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각범 칼럼] 부패정치·선동정치에 위협받는 법치

[이각범 칼럼] 부패정치·선동정치에 위협받는 법치

기사승인 2023. 10. 15.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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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각범 사진 2
이각범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
민주주의의 요체는 법치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정치가 법치를 위협하고 있다. 서구의 유명 대학에서 "민주주의는 한마디로 무엇인가"를 설문하면 대체로 '법치'라고 답한다. 우리나라 대학에서 같은 질문을 하니 '선거' 또는 '다수결'이라고 답하였다. 다수결의 횡포 속에서 대한민국 국회는 '존재 이유'를 물어야 할 지경에까지 왔다. 옳고 그름도 다수결로 결정할 태세이다. 의회권력이 시민사회권력과 결합하여 미디어를 수단으로 벌이는 선동공세가 쓰나미처럼 몰아치고 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에 대한 탄핵카드까지 꺼내들려고 한다. 법치를 지키기 위해 자기직분을 다하는 공직자들이 오히려 핍박받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구속영장 발부 여부에 대해 원로 법조인들은 대체로 검찰 수사에서 확보된 증거들로 볼 때 구속영장 발부는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대법관을 지낸 우리 사회의 원로는 "정치적 압박이 거세지만, 국회가 이미 체포동의 하였으므로 법관은 부담 없이 구속영장을 발부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보편적 기대와 달리 이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되었다. "현재까지 확보된 인적, 물적 자료"를 언급하면서도 피의자가 "제1야당의 대표라는 점에서 공적 감시와 비판의 대상인 점 등을 감안할 때,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결정 이유였다.

'진보'를 자처하는 친야(親野) 언론은 일제히 '수사권을 남용한 무리한 표적수사'라며 검찰을 비판하였다. 그동안 각종 시위에 대중동원을 하던 이재명 대표 측은 구속영장기각이 곧 무죄라는 식의 강변으로 성실하게 수사해 온 검찰을 겁박하기 시작했다.

전심전력으로 수사해 온 검찰은 "검은 띠로 눈을 가린 법의 여신이 유독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안대를 풀어버렸다. 만인이 평등하다는 법 앞에서 정치적 힘이 없는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런 결정이 나왔을까" 하는 푸념 한마디 없었다. 검찰수뇌부의 반응은 차분하고 담담하였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사법은 정치적 문제로 변질돼서도 안 되고, 정치적 문제로 변질될 수도 없고 변질되지도 않는다"고 정리하였다. 또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정치인이 범죄를 저지른다고 해서 사법이 정치가 되는 건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며 "검찰이 흔들림 없이 수사할 것"이라고 하였다.

법치를 정치 쓰나미로 덮으려는 거친 선동 공세에 대처하는 공직자들의 의연한 자세가 오히려 돋보였다. 한동훈 장관과 이원석 총장은 일체의 감정적 대응을 자제한 채 '합리성'과 논리성에 입각하여 이 나라의 법치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보여주었다. 건국 이래 김명수 사법부가 등장하기 전까지 쌓아왔던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깨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비등한 가운데, 실력으로 이를 극복하고 진실을 밝혀내겠다는 의지가 확고하였다.

우리나라는 자기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공직자, 군인, 기업인, 학자, 노동자, 예술가 등 각계각층의 노력으로 어려운 순간을 넘겼다. 위기를 탈출하고 발전을 거듭해 왔다. 선동을 일삼는 정치인들이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찾기는 어렵다.

EPL 골 득점 상위를 달리는 손흥민 선수의 정확하고 멋있는 동작을 보며 관중들은 환호하지만, 그의 화려한 슛 뒤에는 하루에 수천 번씩 하는 슛 연습이 있다는 사실을 일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힘센 사람의 부패범죄로부터 나라와 국민을 지키기 위한 수사를 위하여 엘리트 검사들이 '희생적'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회 일반에서는 알기 어렵다. 스타디움에서 박수 받지 못해도 '책임감'을 가지고 맡은 바 직분에 충실한 공직자의 모습은 멋있었다.

비슷한 사례가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다. 2017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으로 갑자기 치러진 대통령선거 당시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달리던 반기문 총장에 대하여 대통령선거 출마를 이미 선언한 이재명 성남시장에게 기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반기문씨는 유엔 사무총장을 하면서 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당시 '사이다 발언'으로 대중적 바람을 몰고 다니던 이재명 시장다웠다. 듣기에는 시원해도 사실과 반하는 정치적 레토릭이다.

반기문 총장은 유엔 역사에 남는 두 가지 큰 업적을 남겼다. 하나는 파리기후협약(유엔기후변화협약)의 성공적 체결이다. 협약은 인류의 미래와 직결된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유엔사무총장의 이니셔티브로 진행되었지만 195개 참가국의 개별적 입장이 얽혀 있었다. 총론에는 쉽게 합의하면서도 각론에서 차이를 보이던 참가국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조율하였다. 단 한 나라의 이탈 없이 협약을 체결하고 발효시키는 쉽지 않은 과정에서 반 총장은 1년에 70회 이상의 장거리 비행을 하며 당사국들을 설득해 나갔다. 글로벌 공직자의 성실하면서도 책임감 있는 노력이 빛났다.

또 다른 하나의 업적은 유엔과 산하기구에 종사하는 직원들의 구성비를 크게 바꾼 일이다. 종래에는 옛 식민지종주국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반기문 총장은 이른바 제3세계 출신과 여성의 비율을 대폭 높이는 개혁을 단행했다. 이에 종래 유엔에서 기득권을 갖고 있던 나라 언론들의 비판적 논평이 뒤따랐다. 이상하게도 한국 정치계는 한국이 배출한 유엔사무총장의 업적을 옹호하는 대신 깎아 내리기에 바빴다.

부패정치의 거센 파도를 맞받아 가며 법치(法治)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대한민국 공직자들은 외롭다. 그렇지만 해박한 법 지식을 무기로 주어진 임무를 성실하고도 책임감 있게 수행하는 그들에게 지지를 보내는 우리 사회의 조용한 다수(silent majority)가 있다. 당정(黨政)을 통틀어 한동훈 장관만큼 명쾌함과 합리성을 겸비하며 예리한 지적으로 수준 낮은 공격을 퇴치하는 인사가 많지 않다. 여당은 전력보강을 위하여, 야당은 체급 올리기 대상으로 한 장관을 정치권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한 장관이 혼탁하고 저급한 정치계에 발을 딛는 대신 이 나라 법치의 든든한 기둥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면서 응원하는 다수의 국민도 존재한다.

이각범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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